카투사 일기

22. 제대병 환송 파티

by 박인권

22. 제대병 환송 파티


카투사 스낵바

전역(轉役)을 앞둔 선임 카투사를 위한 행사가 있다. 후임 카투사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한 2년여의 세월을 마무리하는 환송 파티. 군 복무에 마침표를 찍는 이날, 제대병은 제대병대로 후임병들은 후임병들대로 만감(萬感)이 교차한다. 생면부지로 만나 부대끼며 생활하느라 온갖 일이 벌어졌을 터.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각기 서로 다른 상념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중대 제대병 환송 파티는 전통적으로 내무반 바로 옆의 스낵바에서 열렸다. 한국 음식이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들러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곳이다.


자대 배치 후 처음으로 제대자 환송 파티에 참석했을 때다. 통째로 빌린 스낵바에 중대 카투사 20여 명이 모였다. 카투사들은 여러 개의 식탁을 잇대어 만든 기다란 일자 대형의 탁자를 마주 보고 앉았다. 꽃무늬 비닐 식탁보를 두른 식탁마다 미리 주문한 안주류와 빛바랜 양은 주전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메인 안주는 카투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제육볶음과 김치찌개. 스낵바를 혼자서 운영하는 중년의 한국인 아주머니가 손수 내놓은 것으로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날 정도로 맛이 꽤 괜찮은 편이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찌그러진 주전자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소주와 콜라를 1대 1 비율로 섞은 일명 소콜 칵테일. 수년 전 제대한 중대의 카투사 선임이 개발했다는 소콜 칵테일은 톡 쏘는 맛과 부드러운 맛이 대비적으로 어우러져 중독성이 있었다. 소주만 마실 때보다 목 넘김이 편안하고 그 기분에 홀려 주량은 늘 저항선을 넘기 마련이라 다음 날 만만찮은 뒤끝에 시달리곤 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환송 파티의 음주 양상은 언제나 과속 질주의 스타일로 흐른다.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추억에 취한 중대원들은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시고 빨리 마신다. 술잔은 제대병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행사의 주인공이라 당연한 광경이다. 중대원들이 제대병에게 권하는 술잔의 의미는 다층적이면서 감정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애증의 징표인가 하면, 오랫동안 속에 묻어둔 서운한 마음을 비로소 토로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남다른 정분(情分)을 과시하는 의기투합의 술판이자 석별(惜別)의 무대이기도 하다.


환송 파티의 이상 조짐

때로는 환송 파티가 난장판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술판이 무르익고 거나하기 취기(醉氣)가 오르면 이상한 낌새가 감지된다. 아슬아슬한 장면이 스멀스멀 나타나 긴장감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제대병과의 불편했던 옛 기억에 감정이 격해진 선임급 후임병이 술김에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거나 딴지를 놓는 돌출 행동에 나설 때다. 자칫 험악한 사태로 번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제대 말년에 언성을 높여봤자 스스로 체면만 구기는 법. 약삭빠른 제대병이라면 못 들은 채 웃어넘긴다. 환송 파티에 여러 번 참석한 경험 많은 선임병도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진화에 나선다.


이쯤에서 상황이 종료되면 좋으련만, 때로는 끝내 사달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제력을 상실한 제대병과 이에 질세라 단단히 독기를 품은 후임병이 팽팽한 말싸움 끝에 몸싸움도 불사하는 경우다. 급기야 술상이 엎어지는 등 술자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내상(內傷)의 상처는 제대병이 훨씬 더 크다. 속된 말로 끈 떨어진 제대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 전역이 임박한 상황에서 후임병에게 볼썽사나운 꼴을 당하고 망신살만 뻗칠 뿐이다. 못마땅하더라도 인내심을 발휘해 영리하게 위기를 넘겨야 했는데 불뚝성을 참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제대병에 맞선 후임병도 환송 파티 분위기를 아수라장으로 망친 책임에서 떳떳할 수 없다. 억울한 감정이 있더라도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임계점은 넘지 말아야 하는데, 신체적 충돌을 유발한 점에서 훗날 자신도 똑같은 처지에 놓일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대병을 두둔한다기보다 인간은 누구나 비루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에서다. 엄격한 규율과 상하 간에 계급의 원칙이 작동하는 군대라면 더욱 그렇다. 과격한 행동은 그런 점에서 신중한 비판보다 지혜롭지 못하다. 성질나는 대로 분풀이한 뒤끝은 개운치 않다. 그런 사례는 환송 파티에서 종종 목격된다.

그러나 대개의 환송 파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장소를 옮겨 2차 술자리로 이어져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제대병에게는 중대원들의 뜻을 모은 감사패와 기념 트로피도 증정된다. 군대라는 울타리에서 비슷한 또래끼리 만난 인연은 제대 후 전우(戰友) 모임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어느덧 모두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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