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단골 술집에서 벌어진 일
24. 단골 술집에서 벌어진 일
중대 카투사들의 사랑방
동두천 시내에 중대 카투사들이 단골로 이용하는 술집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구(舊) 동두천시외버스터미널 근처 먹자골목에 자리한 곳인데 술값이 싸고 안주가 푸짐해 중대 카투사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 다락방처럼 조용하고 널찍한 공간이 2층에 따로 마련돼 있어 중대원들이 단체로 회식할 때는 꼭 이곳을 찾았다. 술값 부담도 덜고 안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김치찌개와 해물파전, 오징어 두루치기를 시키면 무한 리필로 제공되는 서비스 안주가 여남은 개나 딸려 나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카투사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서비스 안주라지만 만만한 것들로 채워진 게 아니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삶은 다슬기와 번데기, 고구마튀김, 어묵탕, 오이소박이가 고정으로 나왔고 계절별 식재료로 만든 제철 음식이 곁들여져 메인 안주 못지않았다. 단체 회식뿐 아니라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술자리를 가질 때도 어김없이 가성비가 뛰어난 이 집을 선택하는 이유다.
불길한 징조
그날은 평소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모든 불길한 일에는 징조가 있듯이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닐곱 명의 중대원들이 언제나처럼 2층으로 올라갔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우리 또래의 일반인 남자 손님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판을 벌인 건지 그들은 이미 거나하게 술기운이 오른 듯 보였다. 옆 테이블로 밀어 놓은 소주 빈 병이 10개가 넘었고, 맥주병도 여러 개가 쌓여 있었다. 술에 취하면 목소리도 높아지고 말도 많아지는 법. 젊은이들은 서로 악을 쓰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다섯 명이 번갈아 가며 왁자지껄 내뱉는 소리가 우리들의 대화를 집어삼켰다. 의식적으로 그들을 힐끔 쳐다봤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질 급한 동료 한 명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모두 막아섰다. 괜한 시비로 티격태격하다가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빚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의 말다툼은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라 우리는 옆 테이블의 행태를 애써 모른 체 했다. 적당한 취기에 술자리의 흥이 무르익을 즈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이었다.
조금 전의 동료가 참다못해 옆 테이블 손님과 언성을 높이는가 싶더니 멱살잡이에 이어 기어이 주먹다짐까지 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다급하게 싸움을 뜯어말리던 중 옆 테이블의 또 다른 누군가가 소주병을 깨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전됐다. 밀치고 넘어지고 육체적인 충돌이 오갔다. 일단 현장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지만,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술집 안으로 인근 파출소 순경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큰일 났다 싶은 술집 주인이 신고한 모양이었다.
헌병대 지구대
현역 군인인 우리는 경찰서 대신 모 헌병대 지구대로 인계됐다. 지구대 사무실 TV에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경기 녹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졸지에 쌍방 과실로 인한 피의자 신세가 된 우리에게 헌병대 당직 사관은 “이 XX들, 너희 모두 군기교육대야!”라고 고함을 지르며 군기(軍紀)를 잡았다.
“일어서”, “앉아” 소리에 맞춰 우리는 “군기”, “확립”이라고 외쳤다. 카투사가 이곳 지구대로 온 것은 너희가 처음이라는 당직 사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절부절,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동료 한 명이 구세주로 나섰다. 경기도 연천 모 한국군 사단의 연대장이 그의 이모부였다. 천만다행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당직 사관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전화를 걸게 해주었다. 30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처로부터 전화를 받은 당직 사관은 또 한 번 군기를 다잡고 일장 훈계를 한 뒤 우리를 방면 조치했다. 지구대 사무실을 나온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아찔한 밤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 술집에 가지 않았다. 동료의 이모부는 훗날 장군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