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하면서 배운 경청, Deep Listening의 기술
Listen carefully
영어 듣기 시험에서 매번 나오는 말이다.
“Hear carefully”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어에서 ‘Listen’은 ‘주의를 기울여 듣는 행위’에 쓰이는 반면
‘Hear’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귀가 열려있기 때문에 저절로 들리는 상황에서 쓰인다.
때문에 ‘방금 무슨 소리 들었어?’는 'Did you just hear that sound?'로 번역된다.
즉, 영어는 ‘주의 깊게 듣다’와 ‘(수동적으로) 듣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분화되어있다.
반면 우리말에서 ‘듣다’는 그저 ‘듣다’이다.
"내 말 듣고 있어?"라고 질문하는 사람의 '듣다'는
'Listen'인데
"듣고 있잖아"라고 대답하는 사람의 '듣다'는 "
Hear"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듣기’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특별한 훈련을 요하지 않는 ‘능력’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진정으로 ‘Listen’하고 있을까?
통역사로 먹고산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Listen’이 가능해야 함을 의미한다.
거의 이십 년간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단어를 듣는 것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몸소 배웠다. ‘Listen’ 정도가 아니라 ‘Deep Listening’ 을 할 때만이 의미, 감정, 의도에 다다를 수 있다. ‘
회의에서 가장 집중하고 듣고 있을 사람은 십중팔구 통역사일 것이다. 직업상 회의에서 연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딴생각에 빠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 몇 초 사이에도 결정적인 정보가 담겨있을 수 있다. 모든 단어, 모든 뉘앙스, 모든 침묵에 무게가 실려있다.
Deep Listening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흡수하는 동시에 외부와 내부의 방해 요소를 걸러내는 능력이다.
단순히 단어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고 단어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모든 미묘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처음 통역을 시작했을 때는 단순히 집중하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Deep Listening 이란 집중력뿐만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정서적 개방성을 필요로 하는 의도적인 행위임을 깨달았다.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 즉 멈춤, 어조, 회의장의 에너지까지 포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때문에 통역사들은 연사와 떨어져 부스 안에서 동시통역을 할 때도 자리에서 회의장이 잘 보이는지 반드시 확인한다. 무심결에 회의장 뒤에서 서서 통역 부스 앞을 가리는 분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여전히 헤드폰을 통해서 연사의 말을 듣고 있지만 비언어적 정보가 순식간에 차단돼버린다.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우리 눈을 가린 것 같은 답답함이다.
Deep Listening의 층위
깊이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 감정, 맥락까지 해석하는 일이다. 다급하게 말하는 단어는 망설이면서 말하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진정한 이해보다 속도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Deep Listening은 매우 드물고 가치 있는 기술이 되었다.
Deep Listening 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1) 표면: 단어 자체
실제로 말하는 단어 자체다
. 우리는 종종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숙련된 통역사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표면적 의미는 더 깊은 층위의 맥락이 없으면
오역으로 이어지거나 불완전한 의미 전달이 될 수 있다
. 단어 자체만 해석하다가 문제가 되는 일은 허다하다
.
이십 년 전쯤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에게 “He is an easy man to talk to”라고 말한 것이 크게 기사화된 적이 있다. ‘easy’가 ‘쉬운’으로 직역이 되면서 미국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을 홀대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여기서 ‘easy’는 대화하기 ‘편한’ 상대라는 의미에 가깝다. “She’s easy to work with”라고 하면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이라는 칭찬이다.
2) 감정: 어조와 에너지
화자의 어조와 에너지를 들을 수 있다면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
. 자신감에 찬 어조인지,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지
? 격앙된 상태인지에 따라 메시지를 해석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 ‘
"사랑해"라는 말은 수많은 뉘앙스와 어조로 말해질 수 있다
.
‘사랑해’라고 말을 하는 것은 그 처음에만 ‘고백’의 의미가 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두 눈을 가득 채우는 당신에게, 이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중략) 마지막에 던져지는 ‘사랑해’라는 말은 ‘미안해’와 ‘고마워’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 (중략) 처음 ‘사랑해’라는 말은 언제나 수줍고 진지하게 발화되며, 과정 속에서의 ‘사랑해’라는 말은 때론 유치하게, 때론 장난스럽게, 때로 느끼하게 때론 청승맞게 발화되지만, 끝에서의 ‘사랑해’라는 말은 모래바람처럼 건조하고 공허하게 발음된다. 처음의 ‘사랑해’라는 말이 신음의 형식을, 과정의 ‘사랑해’라는 말이 감탄 혹은 즐김, 의지 혹은 속박과 테러의 형식을 표면화한다면, 끝의 ‘사랑해’라는 말은 학살의 형식을 표면화한다.
<마음사전>_김소연
3) 맥락: 상황적 배경
진공 상태로 존재하는 메시지는 없다. 모든 단어는 문화적, 상황적 맥락에 따라 색채가 달라진다. 우리말에서
'잘한다"가 정말 칭찬일 때가 있고 상황에 따라 반어법으로 쓰일 때까 있는 것처럼 영어도 마찬가지다.
‘Wondaful’이 ‘훌륭하다, 좋다’는 뜻이지만 맥락에 따라서는 ‘엎친 데 덮친 격’, ‘가지가지한다’라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는 표현이다.
Deep Listening에 도달하기까지
Deep Listening은 결코 쉽지 않다. 복잡한 논의가 길어지는 통역을 하다 보면 부하가 걸려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기 마련이다. 민감하거나 괴로울 수 있는 내용을 듣는 데 따른 감정적 부담도 있다. 동료 선생님 중의 한 분은 소들이 도축되는 현장에서 통역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끔찍한 광경에 충격을 받고 그 이후부터는 스테이크를 못 먹게 되셨다고 한다. 온전한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단순한 기술 이상의 정신적 훈련과 정서적 회복력이 필요하다.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반응하는 경향도 Deep Listening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다. 어떤 상황에서든 중립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역하는 순간에는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체계나 신념은 옆으로 완전히 제쳐두고 깨끗한 캔버스가 되어야 한다.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으면 해석이 흐려져 잘못된 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통역사의 임무 중 하나는 화자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삶에 적용하는 Deep Listening
Deep Listening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깊이 경청하는 법을 배우면서 인내심과 공감 능력도 기를 수 있다. Deep Listening을 습득하는 것은 ‘좋은 인간이 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만한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그 목소리에 온전한 관심을 기울여
Hear가 아니라 Listen 하는 것이리라.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경청이다."
“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
– Paul Tillich
표지사진: Unsplash의Brett Jordan
중간 사진: Unsplash의Keren Fed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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