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 다시 일상으로
나에게는 이상한 애인이 있다.
확실히, 애인은 맞다.
아이가 잠든 밤, 늦은 시간 은밀히 마주 앉는다.
그이는 누구에게도 없는 미덕을 지녔다.
- 자기만 바라보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 내가 다른 이에게 한눈을 팔아도 토라지지 않는다.
- 연락이 끊겼다고 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따지지도 않는다.
- 아주 오랜만에 찾아가도 “이제 와서?”라고 묻지 않는다.
- 심지어 자신이 다른 존재들과 나란히 놓여 있어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다시 손을 내미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조용히, 완전히 삼켜버린다.
때로는 냉철한 이성과 치열한 논리로,
때로는 처연한 문장과 묵직한 여운으로,
때로는 숨 막히는 열정과 강렬한 감동으로.
매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며 나를 사로잡는다.
이런 팔색조 같은 애인을 곁에 두고 있다.
바로, 나의 책들이다.
보통 두세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편이다.
(요즘은 폴 오스터의 소설 <Sunset Park>와 철학자 한병철의 신간 <관조하는 삶>을 함께 보고 있다.)
일하는 책상 위에도, 식탁 위에도,
그리고 아직도 내가 옆에 있어야 잠드는 딸아이의 방에도 내 책이 놓여 있다.
어떤 날은 한 권과 뜨겁게 빠져들다가도,
다른 날엔 또 다른 책에 눈길을 빼앗긴다.
그러다 다시 돌아가도 아무렇지 않다.
그간 어디 갔었냐는 타박도 없고,
다른 책과 나눈 교감에 질투하지도 않는다.
기다림이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의 태도라고 했던가.
며칠 만에, 몇 주 만에, 어쩌면 몇 년 만에 다시 펼쳐도
책은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격렬하게 나를 맞아준다.
그리고 그 속 이야기는 또다시 나를 깊숙이 끌어당긴다.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이보다 더 완벽한 애인이 또 있을까.
우리 사이엔 가슴 아픈 이별도 없다.
책꽂이 앞에 서면 옛 연인들이 가지런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닳아버린 표지, 좋아하는 구절에 그어진 연필 자국들.
내 인생의 어느 한때,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했던 책들.
그 변화무쌍한 시간의 결을 따라
내 이야기를 켜켜이 기억하고 있는 속 깊은 애인.
그 공고한 신뢰와 변함없는 존재감이야말로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
게다가 그 점잖은 외관과는 딴판으로
새로운 책이든,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든,
파고들수록 각자의 치명적이고 도발적인 매력이 있다.
그러니 나는 아마도 평생 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것 같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축복의 시' 일부
표지 사진: Unsplash의Jonas Jacobsson
#책#책예찬#독서#문학#보르헤스#책과밤#축복#책꽂이#읽는즐거움#행복#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