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집착에서 우아한 독립으로, 글렌 클로즈가 쓴 백지의 서사
글렌 클로즈라는 이름을 들으면 여전히 많은 이들이 1988년작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를 떠올릴 것이다. 단 며칠간의 짧은 일탈을 공유했던 유부남(마이클 더글라스)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며 압도적인 광기를 뿜어내던 ‘알렉스’. 그 연기가 너무나 형형했던 탓에, 나에게 그녀의 얼굴은 오랫동안 섬뜩하면서도 애처로운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주연을 맡은 영화 <더 와이프 (The Wife)> 라... 재생 버튼을 누르기까지 약간 주저했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의 편견은 무너졌다. 화면 속 그녀는 광기 어린 침입자가 아니라, 남편의 약을 챙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내조의 여왕’ 조안으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나 있었다. 명배우는 하얀 도화지와 같다더니, 그녀는 조용한 인내와 헌신을 몸에 두른 현모양처 그 자체였다.
영화는 남편 조셉 캐슬먼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며 시작된다. 영광의 순간을 위해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부부의 모습은 겉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다. 그러나 이들의 견고한 성 뒤편에는 40년간 묵인해온 서늘한 진실이 숨어 있다.
이야기는 1958년, 교수였던 조셉과 문학적 재능이 넘치던 여대생 조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작가의 재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 조안은 조셉의 아내가 되어 자신의 글을 남편의 이름으로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40년. 남편이 거장 작가로 칭송받는 동안 조안은 그림자 속에서 글을 썼고, 남편의 이기적인 성격과 반복되는 외도를 묵묵히 견뎌왔다.
참아왔던 그녀의 세계가 무너진 건, 역설적이게도 남편의 생애 가장 화려한 정점의 순간이었다. 노벨상 만찬장에서 남편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전한다.
“내 아내는 나의 뮤즈였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이 달콤한 찬사는 조안에게 축복이 아닌, 자신의 존엄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다가온다. ‘뮤즈(Muse)’.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라는 이 낭만적인 단어는, 실상 조안이 쏟아부은 40년의 노동과 천재성을 ‘영감’이라는 추상적인 이름 뒤로 은폐해버리는 낙인이었기 때문이다. 창작자인 그녀에게 뮤즈라는 호칭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주인이 아닌 도구로 남으라는 선고와 같았다. 결국 그녀는 그 절정의 순간에 이혼을 통보하며 비로소 ‘독립’을 선언한다. 그녀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편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남편의 죽음은 비극이었으나, 동시에 조안에게는 40년 만에 찾아온 지독하게 고요한 자유였다. 누군가의 영감을 자극해야 한다는 '뮤즈'의 강박과, 내 문장을 도둑맞아야 했던 기만적 삶은 스톡홀름의 차가운 공기 속에 남겨두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하얀 백지를 매만지는 조안의 표정에는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기묘한 해방감이 서려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배경이 아닌 ‘조안 캐슬먼’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는 자의 떨리는 설렘이다.
그녀가 40년 만에 마주한 하얀 백지는 더 이상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야 하는 두려움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진실을 담아낼 자유의 영토다. 예술가의 뒤에 가려진 '뮤즈'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얼마나 잔인한 지우개였는지를 목도하며, 우리는 비로소 조안의 서늘한 해방감에 동참하게 된다.
예술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남자 예술가와 그들의 ‘뮤즈’ 이야기가 넘쳐난다. 조각가 로댕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그늘에 가려져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쓸쓸한 생을 마감했고, 수많은 화가의 연인들 역시 캔버스 위의 피사체로만 기억될 뿐 그들이 창작 과정에서 나누었던 예술적 교감과 실질적인 기여는 지워지곤 했다. <더 와이프>는 그들이 단순한 영감의 원천이 아닌, 피와 땀을 흘린 동등한 창작자였음을 조안의 분노를 통해 대변한다.
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글렌 클로즈의 얼굴이었다. 광기를 걷어낸 자리에 들어찬 섬세한 표정의 결들은, 40년 전 <위험한 정사>속 '알렉스'를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찰나의 눈떨림만으로 한 여자의 전 생애를 증명해내는 그녀의 연기는, 조안 캐슬먼이 던진 독립 선언에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실어준다.
표지 사진: Unsplash의The Cleveland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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