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기업은 면접 안내 메일에서, 면접 시 복장을 '캐주얼 정장'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는 적힌 그대로, 검은 바지와 검은 맨투맨 위에 갈색 재킷을 걸치고 면접장으로 향한다. 대기실에 도착해보니, 그를 제외한 모든 면접자들이 면접용 정장을 입고 앉아 있다.
그는 자신도 정장을 입고 왔어야 하나 잠깐 의심이 드려다가 만다. 그의 정신력이 강해서 의심이 흩어진 것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체념의 감정으로 인한 것이라는 해석이 더 맞다. 그는 기업 조사를 하면서, 매장 방문을 하면서, 면접을 안내하는 인사팀 직원의 얼굴을 보며, 대기실에 앉아 있는 면접자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어렴풋이 깨달았다. 4번째 기업은 그와는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4번째 기업의 매장들은 아기자기하고 화려하면서도 캐릭터를 박아 넣은 상품들을 판매한다. 4번째 기업에 도착해 그가 본 사람들도 하나같이 세련됐거나 여리여리한 느낌을 풍긴다. 남자 직원이나 남자 지원자들에게서도 그렇다. 인사팀 직원, 종종 지나가는 다른 직원들의 옷차림도 그의 감성과 맞지 않는다. 그는 면접 대기실에 있는 인원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생김새가 강했으며, 이는 면접장에 들어간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최선을 다해 면접에 임한다. 잡X레닛의 면접 후기에 의하면, 4번째 기업은 '토론 면접'을 진행한다고 했다. 지원자들에게 주제를 하나 던져주고, 그 자리에서 찬반으로 나누어 토론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토론은 꽤나 자신이 있다.
면접 대기실 안, 총 6명의 지원자가 말없이 앉아 있다. 5명 모두 모나미 볼펜 같이 정형화된 까맣고 하얀 정장을 입었고, 그 홀로 캐주얼 정장을 입었다. 그는 복장 측면에서도, 자신만의 차별화된 자유로움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이윽고, 인사팀 직원이 들어와 지원자들을 면접장으로 안내한다. 6명의 지원자는 한 줄로 서서 나란히 면접장으로 들어간다.
4번째 기업, 재무회계 신입
면접자 : 그를 포함해서 총 6명 (남자 3 / 여자 3)
스튜어디스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 면접자 1
증권사 인턴을 하고 AICPA를 취득한 여자 면접자 2
키가 중간에 안경을 끼고 머리에 약간 노란 빛이 도는 남자 면접자 3
키가 작고 말랐으며, 안경을 낀 남자 면접자 4
그
키가 작고 말랐지만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여자 면접자 6
면접관 : 총 2명 (남자 1 / 여자 1), 여자 면접관이 상사로 보이며 주로 면접을 진행한다.
40대로 추정되는, 단발머리에 강한 눈매를 가진 여자 면접관 1
안경을 낀, 30대 후반~40대로 보이는 온화한 인상의 남자 면접관 2
면접장은 넓은 강의실 같은 장소인데, 면접관과 면접자를 위한 의자만 놓여있다.
면접관 1 : 안녕하세요, 편하게 앉으세요.
면접자 일동 : (앉으면서 제각기)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1 : 네 반가워요. 우선 면접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를 해주겠어요? 면접자 1부터 해주세요.
면접자 1 : 안녕하십니까, 숫자로 소통하는 지원자, 면접자 1입니다. 저는 마케팅 공모전에서~ ...
면접자 2 : 안녕하십니까, 면접자 2입니다. ...
그는 이전의 면접들에서 하나같이 남자 면접관과 남자 지원자들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자 면접관 / 여자 지원자들과 함께 있는 상황이 꽤나 새롭다. 또한, 여자 지원자들의 자기소개도 참신하다고 생각한다. 여성 지원자들은 다들 인턴이나 마케팅 공모전 수상 등 그의 눈이 커질 법한 활동을 하나씩 어필한다.
면접자 3 : 안녕하십니까, 재무회계 지원자 면접자 3입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회계를 공부하며...
면접자 4 : 안녕하십니까, 꼼꼼한 지원자, 면접자 4입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회계를 공부하며 기업의 재무제표를 분석했습니다. 차변과 대변을 맞추는 것, 그리고 재무 지표를 건전하게 하는 것의 의미를 깨닫고 그 보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선 두 여자 지원자들에 비해, 남자 지원자들의 스펙은 특출나지 않다. 그는 면접자 4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숫자와 재무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봉하듯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나 신기하다. 면접자 4는, 재무제표의 숫자를 분석하고 지표를 개선하는 것에 사명감이라도 가진 마냥 이야기했다. 정말 깊이 있게 공부를 하고 신념을 가진 것인지, 그냥 멋있어 보이거나 재밌어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기소개를 하는 면접자 4의 눈을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념, 어찌 보면 광기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면접자 4가 진정으로 그런 신념을 가진 것일 수도, 아니면 면접장에서 가면을 제대로 쓰는 재주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이전의 면접들에서와 똑같은 자기소개를 했으며, 면접자 6은 다른 여자 지원자들과 비슷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면접관 2 : 네, 잘 들었습니다. 면접을 시작함에 앞서, 토론 면접을 진행하겠습니다. 주제와 관련 정보를 드릴 테니, 찬반으로 나누어서 토론을 하시면 됩니다. 제한 시간이나 정해진 룰이 없는 자유 토론입니다. 6명이시니, 임의로 3명씩 찬반을 나누겠습니다.
반대 - 면접자 1, 2, 3
찬성 - 면접자 4, 그, 6
가운데를 띄우고 찬반 측이 마주보도록 의자를 옮겨주세요. 면접관이 없다 생각하고 진행하시면 됩니다.
면접자 2 : 사회자도, 제한 시간도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면접관 1 : 네, 자유롭게 토론하시면 됩니다. 주제는, '반려견 보유세' 입니다. 최근 반려 동물을 유기하는 사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반려견 보유세' 도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해외 사례의 경우 ... 찬성하는 측의 근거는 ... 반대하는 측의 근거는 ...
그럼 지금부터 토론 시작하겠습니다.
자유로운 것인지, 틀이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아 어수선한 것인지,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토론이 시작된다. 그에게 할당된 입장은 '반려견 보유세 도입 찬성'이다. 실제 그의 의견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는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한다. 사회자도 무엇도 없기 때문에, 토론 시작 후 면접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약간의 정적이 흐른다.
면접자 1 : 제가 먼저 발언하겠습니다. 저는 반려견 보유세 도입에 반대합니다. 반려견 보유세를 도입할 경우, 반려견을 키우고 싶은 이들 중 부담이 되어 반려견을 키우지 못하는 사례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반려견 보유세를 걷지 않고, 그 돈을 차라리 자신들이 키우는 반려견에게 쓰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면접자 2 : 저도 발언하겠습니다. 반려견 보유세의 경우, 이름 그대로 세금입니다. 우리나라 세법 상, 수익이 있는 곳에 과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반려견 보유는 수익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려견 보유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우리나라 조세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면접자 6 : 찬성 측 발언하겠습니다. 주어진 정보에서 들은 바와 같이, 최근 반려 동물 유기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도입하자는 것이 반려견 보유세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벌주기 위한 벌금으로서의 반려견 보유세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 동물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의 반려견 보유세를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 : 안녕하세요, 찬성 측 추가 발언하겠습니다. 아까 찬성 측에서 보유세를 걷는 대신, 그 보유세를 스스로 쓰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지금 반려견 보유세 논의가 대두한 이유는, 자신의 반려견에게 기꺼이 돈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려 동물을 무분별하게 유기하는 이들 때문입니다. 반려견 보유세를 걷지 않고 스스로 쓰게끔 한다고 해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유기견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반려견 보유세를 걷음으로써, 반려견에게 해당 금액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만한 투자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반려견을 기르는 것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면접자 2께서 조세원칙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조세 원칙의 정의는 동의합니다만, 조세원칙에도 예외는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해외 자금 유치를 통해 주식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주식 거래에 대해서는 세금을 덜 부과하는 것처럼, 각 시장이나 나라 사정에 맞게 조세 원칙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려견 보유세는 사회적인 보험금 성격도 띱니다. 해결되지 않는 유기견 문제를 해결하고자, 반려 동물을 키우는 당사자들에게 걷는 보험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대 측은 주로 면접자 1과 2가 발언했고, 찬성 측은 그와 면접자 6이 주로 발언했다. 그는 면접관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말이 없는 같은 편의 면접자 4에게 발언 기회를 주고자 했다. 하지만 면접자 4는 자기소개 때에 보여주었던 광기와 같은 신념이, 반려견 보유세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없는 듯하다. 면접자 4는 그와 면접자 6이 했던 말들을 되풀이하는 수준에서, 한 두 번 발언하고 그친다. 그는 속으로, 면접자 4가 은근히 답답하다.
토론은 계속된다. 면접관들은 제대로 듣기는 하는 것인지, 거의 방치하다시피 토론을 듣고만 있다. 끝내는 시간은 언제인지, 결론은 어떻게 내라는지 가이드가 전혀 없으니 토론이 점점 산으로 간다. 마침내 면접자들은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면접자 1 : 저는 지금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반려동물을 돌볼 때마다, 저는 정말 행복하고 즐거움을 느낍니다. 반려견 보유세는 벌금적 성격으로, 순수하고 행복한 의도로 반려견을 키우는 견주들이 오히려 벌금을 내게 하는 양상을 띕니다. 반드시 반려견 보유세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유기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다른 방안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발언이, 개인적 경험과 감정에 치우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 : 물론 면접자 1과 같은 견주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대두되고 있는 유기견 사태는 면접자 1과 다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무분별하게 반려 동물을 키워보고, 무책임하게 유기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반려견 보유세는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려견 보유세 이외에, 유기견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있다면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면접자 3 : (반대 측, 처음으로 입을 연다)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만, 말해도 될까요? 저는... 반려견 보유세가 벌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반려 동물을 유기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 그런데 반려견 보유세는 벌금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질문이 뭔지 다시 말씀해주실래요?
면접자 3 : 아 네, 그러니까.. 반려견 보유세는 벌금이 아니라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 (속으로 웃으며) 방금 면접자 1께서는 순수한 견주들에게 벌금이 전가되는 식이어서 반려견 보유세를 반대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면접자 3께서는 오히려 반려견 보유세가 벌금이 아니어서 반대한다는 뜻인가요?
면접자 3 : 아... 그 부분은.... 저희 반대 측에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벌금이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면접자 6 : 해당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답하겠습니다. ...
그는, 토론의 흐름과 분위기는 자신이 속한 찬성 측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고 즉석에서 시작한 토론 면접에서의 승패는 의미가 없다. 그는 수많은 면접 후기들을 읽으며, 특히 토론 면접에서의 합격 팁을 읽은 적이 있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펼치며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면접관들이 높게 치는 점은 '사회자'라는 것이다. 즉, 틈틈이 시간을 체크하며 여러 사람에게 발언 기회를 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토론을 마무리하게끔 전체를 지휘하는 이가 토론 면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면접자 중 몇몇도, 사회자 노릇을 해보겠다고 발언이 적은 참가자에게 발언을 유도하는 식의 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 그의 눈에 귀여워 보일 정도다. (다른 면접자들은 그보다 나이가 어린 듯하다)
그는 면접 후기의 말대로, 면접관들의 입맛에 맞게 사회자로서 토론을 종결하는 역할을 해볼까 생각한다. 토론이 시작된 후 시간은 이미 40분을 넘겼다. 하지만 면접관들은 미동이 없다. 무언가 받아 적거나 평가하는 낌새도 보이지 않고, 아이들 토론 놀이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그저 관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는, 면접관들의 이러한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냥 떠들어보라고 시킨 것인가? 면접관들이 토론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듯하자, 그는 사회자 노릇을 해보려다가 그만둔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 토론이 도대체 어디까지 흘러갈지 그냥 내버려둔다.
결국 토론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서야, 면접관이 직접 제지한다.
면접관 1 : 그만, 잘 들었습니다. 토론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너무나도 열정적인 토론이라, 흥미롭게 들었네요. 자 이제 다시 자리를 옮겨주세요.
그는 토론 도중 슬쩍슬쩍 면접관들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흥미롭게 들었다는 감상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토론만 1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남은 면접은 길어봐야 30분이리라, 그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