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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째 기업 면접 대기

자유로운 복장

by 하얀 얼굴 학생

안내받은 면접날, 그는 노트북을 켜고 책상에 앉아 있다. 18번째 기업은, 1차 면접을 화상 면접으로 진행한다. 사전에 공지받은 프로그램에 접속해서(아마 Zoom이었을 것이다), 카메라와 마이크 상태를 점검한다. 벌써 면접만 스무 번째이고, 화상 면접은 못해도 5차례 정도 경험한 그다. 아무래도 화상 면접이 대면 면접에 비해 긴장이 덜하다.


18번째 기업은, 면접자들이 '자유로운 복장'을 입으라고 메일을 보냈다. 자유로운 복장이라. 기업이 아무리 복장을 자유롭게 입으라고 해도 취업이 간절한 취준생들은 생각이 많다. 답답한 정장보다야 편한 옷이 좋지만, 간신히 잡은 면접 기회를 옷차림 때문에 날려버릴 수 있다. 기업이 안내한 '자유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면접관의 눈에 복장이 성의 없어 보이면, 첫인상부터 점수를 깎아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이 아무리 복장을 자유롭게 입으라고 해도, 면접자들은 항상 정장을 입는다. 기업들도 경험상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평상복을 입게 하려는 기업들은 '정장 금지'라고 안내하기도 한다.


그는 패기로운 것인지, 광기에 찬 것인지, 면접을 너무 많이 봐서 겁을 상실한 것인지, 정장을 입지 않는다. 메일에 대놓고 자유로운 복장을 입으라고 했으니까. 그는 그냥 검은색 맨투맨 티를 입는다. 검은색 맨투맨이면, 정장보다는 약간 튀지만 그래도 선을 넘는 복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다. 어차피 화상 면접이기 때문에 상반신도 절반 정도밖에 안 보인다. 무늬 없는 검은색 맨투맨이면 괜찮으리라.



화상 면접 링크를 누르자, 면접 대기실로 접속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ㄱ그룹, 그것도 백화점 그룹의 18번째 기업이라 그런지 면접자가 많다. 대기실에는 면접에 참석하는 면접자 전원, 그리고 18번째 기업 인사팀 직원이 접속해 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인사팀 직원이 마이크를 켜고 안내한다. 지금부터 출석을 부를 것이며, 출석 확인이 끝나면 함께 면접 보는 조원끼리 다시 소규모 대기실에서 대기할 것이라는 안내다.


인사팀 직원은 출석 확인 시 얼굴도 확인해야 하니, 면접자들에게 잠시 카메라를 켜달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60명이 넘는 면접자들을 차례차례 부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리면서, 대기실에 입장해 있는 수십 명의 다른 면접자들을 쓱 훑어본다. 하나같이 하얗고 까만 정장을 입었으며, 메이크업은 물론 머리까지 세운 면접자들도 간혹 보인다. 자유로운 복장이라고 했는데 너무 딱딱한 것 아닌가. 하지만 18번째 기업이 원하는 자유로움은 정장에 메이크업, 머리까지 세운 자유로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은 탈락이겠지, 자유롭게 입으라 해놓고서 검은 멘투멘조차 트집 잡는 회사라면 그는 미련이 없다.


사실 그도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세운 적이 있다. 바로 1번째 기업 면접을 볼 때다. 단골 미용실을 아침 일찍 예약해서, 난생처음 머리를 세우고 난생처음 분을 찍어바르고 입술까지 칠했다. 얼굴과 머리가 가렵고 어색했지만 합격을 위해서 찍어발랐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화장을 한 다른 지원자들보다 뒤떨어져 보이진 않을까. 외모 때문에 떨어지진 않을까.


그렇게 간절하게 준비하고 온갖 치장을 했던 1번째 기업에게서, 그는 최종 탈락을 맛보았다. 어떠한 피드백도 없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도 없다. 1번째 기업에서의 첫 최종 탈락으로 인해, 그의 내면에 있는 청개구리 기질이 도진 것 같다. 어울리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화장과 겉치장을 했는데, 이렇게 맥없이 탈락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자신의 평상시 모습대로 면접에 참석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명색이 기업 면접인데, 설마 메이크업을 안 했다고 탈락시키겠나. 생각이 이렇게 흐르자, 그는 이후 면접에서 화장과 겉치장을 하지 않는다.



다른 지원자들이 정장을 입고 겉치장을 한 데는, 18번째 기업이 백화점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백화점은 외관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18번째 기업은 식품 관련 업종이지만, 어쨌든 백화점 그룹에 속해있다. 그를 제외한 다른 지원자들은, 18번째 기업 입사가 곧 백화점 입사라는 로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18번째 기업이 속한 그룹의 이름이 백화점 그룹일 뿐, 입사해도 자신이 일할 장소는 백화점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뜩이나 그는 외관과 명분보다는, 내면과 실리에 더 가치를 두는 편이다. 백화점에 대한 동경이나 로망 따위는 없고, 자진해서 자유로운 복장을 포기하고 정장을 입을 생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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