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위로 올라가라고 했는지 알겠지
배가 고파온다. 33번째 기업 면접은 이른 오전이었고, 38번째 기업 면접은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 즈음이다. 그는 긴장할 것을 대비해 아침을 먹지 않았다.
그는 38번째 기업이 탐탁지 않기 때문에, 긴장도 별로 되지 않는다. 그의 정신이 면접 대비 비상사태를 해제하자, 육체가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38번째 기업 주변에 도착했을 때는, 면접 시작으로부터 약 2시간 정도 전이다. 그는 뭔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네이버 지도 어플을 키고, 주변에 음식점이 있나 찾는다. 회사들이 모여있어서 그런지, 주변에 식당이 많다. 그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한다. 평상시 같았으면 햄버거를 먹겠지만, 아침을 먹지 않은 빈 속에 햄버거는 부담스럽다. 이럴 때는 역시 한식이다.
식당을 검색하던 그의 눈에, 칼국수가 눈에 띈다. 칼국수, 닭곰탕 등의 메뉴를 판매하는 식당이다. 콧김이 나오는 추운 날씨, 아침을 먹지 않은 그에게는 완벽한 메뉴다. 리뷰를 보니, 해당 식당은 유명 TV프로 '맛X는 녀석들'에도 출연했던 식당이라고 한다. 그는 이 식당을 목적지로 하고 걷는다. 칼국수를 먹어야 하나 닭곰탕을 먹어야 하나, 아니면 둘 다 먹어야 하나 고민하며 걷는다.
지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하니, 하얀 벽돌로 된 옛날 건물이다. 커다란 글씨로 메뉴를 적은 간판과 현수막 같은 것이 건물을 휘감아,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전부 글씨 투성이다. 외관만 보자면 그리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인상이지만, 또 그렇게 조금 낡은 듯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것이 오래된 맛집의 특징이다. 때마침 출입구에 주인 할머니가 서 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 : (안으로 들어서며) 안녕하세요. 지금 식사되나요?
할머니 : 아유, 그럼요
그 : 칼국수를 먹을까 닭곰탕을 먹을까 하는데요
할머니 : 아유 백숙 백반 먹어
그 : 백숙 백반이 맛있나요?
할머니 : 당연하지
그 : 양이 어떤가요? 제가 배가 좀 고파서... 다른 걸 더 시킬까 하는
할머니 : (거침없이) 아냐 백숙 백반이면 충분해
그 : (할머니의 거침없는 답변에 웃음이 나온다) 아 충분한가요? 그럼 백숙 백반 하나 주세요
할머니 : (주방을 향해) 백숙 백반 하나! (그에게) 저 위층 자리로 올라가
주인 할머니는 그가 식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주문을 받는다. 2층 좌석으로 올라가며 그는 식당 내부를 훑는다. 꽤 넓은 공간에 놓여져 있는 테이블들을 비롯하여 내부 인테리어 대부분이 나무로 되어 있으며, 칠을 한 것인지 건물이 오래되어서인지 나무색이 진하다. 그는 얼떨결에 골랐지만, 상당히 내공이 있는 식당을 찾아왔구나 생각한다.
아직 점심시간 이전이라, 식당 내부는 한산하다. 1층에 넓은 테이블이 많은데, 그는 2층으로 올라간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가니, 2층은 천장고가 낮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방 한켠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난방을 틀었는지 바닥이 온돌처럼 뜨끈하다. 입고 있던 패딩을 벗고 넥타이를 푼다. 자리가 나쁘진 않지만, 1층에서 먹는 것이 더 편할 것이라 생각하는 그다.
그가 주문한 백숙 백반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그리고 그 10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의 옆자리 좌석들은 전부 사람들이 들어찼다. 백숙 백반을 받아보니, 상차림이 상당히 푸짐하다. 주인 할머니가 거침없이 대답한 이유가 있었다.
밥 1 공기
김치 1 접시
조그마한 닭백숙 1마리
양은 냄비에 칼국수 1인분
닭을 푹 고아낸 듯한 닭 육수(닭곰탕) 1 대접
양파
마늘
대파
그는 칼국수를 시킬지 닭곰탕을 시킬지, 둘 다 시켜야 할지 고민했었다. 백숙 백반은 그의 고민을 완벽하게 해결한다. 가격도 만원을 넘지 않는다. 아직 면접이 남았으니, 그는 와이셔츠에 무언가 묻지 않도록 유의하며 식사를 시작한다.
우선 백숙부터 시작한다. 백반 1인분에 알맞는 아담한 크기의 닭이다. 얼마나 푹 고았는지, 젓가락을 대기만 해도 살이 부드럽게 찢어진다. 그는 참지 못하고 닭다리를 입에 문다. 젓가락으로는 쉬이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탄력을 가진 다릿살이, 입 안에서는 부드럽기 그지없다. 다릿살에 빨간 양념이 밴 김치를 올리고서는 다시 베어 문다. 면접이 무엇인지 잊는다.
참지 못하고 닭다리를 베어 물긴 했지만, 그의 원래 순서는 아니다. 그는 양은 냄비에 담긴 칼국수부터 들이킨다. 닭 육수에 간장을 조금 넣은 듯한 국물이며, 면발이 탱탱하다. 아침을 먹지 않아 빈 속을, 칼국수로 먼저 달랜다. 그가 몇 젓가락 들이키니 어느덧 칼국수가 바닥을 보인다.
칼국수를 해치웠지만, 아직 닭곰탕이 남아있다. 커다란 대접 가득, 닭기름이 적당히 떠있는 진한 육수가 담겨 있다. 그는 닭백숙의 뼈와 살을 분리한다. 닭가슴살조차 부드럽다. 해체 작업을 끝낸 뒤, 쌓여있는 부드러운 고기와 대파를 곰탕에 밀어 넣는다. 떨어지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는 뼈가 섞여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준비된 닭곰탕에, 밥 한 공기를 통째로 말아 넣는다. 밥, 고기, 국물을 담은 숟갈에 김치를 얹어 입에 넣는다. 먼저 칼국수로 준비를 끝마친 그의 속이, 메인 요리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인다. 탄력 있는 닭고기, 따뜻한 밥알, 진한 육수와 매콤한 김치가 어우러진다. 소금은 필요 없다. 그는 소금이 담긴 조그만 그릇을 멀리 치워버린다.
식사를 계속할수록, 닭곰탕이 줄어들수록, 그가 넣어먹은 김치로 인해 국물이 점점 더 붉어진다. 이 또한 그가 의도한 것이자 즐기는 맛이다. 김치 양념이 국물에 계속 침투하여, 끝으로 갈수록 국물이 얼큰하고 진해진다. 그가 소금을 치지 않는 이유다.
정신없이 식사를 하던 그때, 김치가 동난다. 직원에게 김치를 더 가져다달라고 말하니 빈 김치 그릇을 가져간다. 그는 직원이 곧바로 돌아올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2층이고 구석진 자리인 데다, 천장도 낮아 그가 직접 움직이기가 애매하다. 이래서 1층에 앉기를 바랬는데. 한창 올라왔던 식사 리듬이 약간 어긋나자 그는 슬며시 심술이 난다. 혼자 왔다고, 단골이 아니라고 2층 구석진 자리로 올려버린 것은 아닐까. 직원이 그의 김치를 까먹은 것은 아닐까 생각할 무렵 김치가 도착한다.
새로운 김치와 함께 다시 식사를 시작한다. 어긋난 줄 알았던 식사 리듬이 다시 올라온다. 너무나도 심취하여, 그는 뒤에 이어질 면접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양파와 생마늘까지 곁들여 먹는다. 닭곰탕이 바닥을 보일 때에 맞춰, 김치와 양파도 바닥을 보인다. 마늘도 바닥을 보이게 하고 싶었으나, 면접을 위해 참는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났다. 휴지로 입을 꼼꼼히 닦고, 혹시 와이셔츠에 김치 양념이 묻진 않았는지 확인한다. 외투와 가방을 챙기고는 방 바깥으로 나온다. 2층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온다. 경사가 높아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텅 비어있던 테이블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사람들이 식사하며 대화하는 소리가 모여 웅웅 울리는, 하나하나 구분하기 힘든 군중의 소리가 난다. 그는 사람들의 정수리와 검은 뒤통수를 보며 계단을 내려온다.
손님이 넘쳐나고, 입장을 기다리는 줄도 상당한 듯하다. 아예 식당 안쪽부터 줄이 시작된다. 그가 주인 할머니와 대화했던 바로 그 위치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와 주인 할머니의 눈이 마주친다. 그는 사람들을 비집고 주인 할머니에게 간다.
주인 할머니 : 맛있게 잘 먹었어?
그 : (결제하며) 네, 너무 잘 먹었어요 (사람이 꽉 찬 주위를 신기한 듯 돌아본다)
주인 할머니 : (카드를 주며) 왜 위로 올라가라고 했는지 알겠지?
그 : (살짝 놀라며) 네, 사람이 엄청 많네요
주인 할머니의 한마디에, 그의 심술이 녹아 없어진다. 주인 할머니는 그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그는 타인에게서 감동을 받는 지점이 약간 특이한 듯하다. 간만에 좋은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식사와 경험을 했다. 이후 면접 결과에 상관없이, 이 식당은 언젠가 꼭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