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워홀러로서 생활을 하려면, 몇몇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저 워킹 비자만 받은 채로 호주에 도착해도, 일을 하거나 급여를 지급받을 수 없다. 호주에서 이른바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서류들이 있다. 이는
1) TFN (Tax File Number) 발급
2) 은행 계좌 개설
3) 국제 운전면허증, RSA, White card 등
1 - TFN은 세금 관련하여 개인에게 부여하는 넘버인데,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워홀러와 같은 이들에게 텍스 파일 넘버는 그야말로 주민등록번호와 같다. TFN은 신청 - 검토 - 발급의 과정을 거치는데, 검토에 1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발급은 우편으로 한다. 다시 말해, 호주에 도착해서 우편으로 수령해야 한다. 그도 호주에 도착해 숙소를 정한 이후에 TFN을 신청하고 우편 수령했다.
TFN이 필수인 것은, 호주 정부가 모든 소득에 15%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워홀러는 무슨 일을 하던 호주 정부에 15%의 세금을 내야 한다. 최저 시급이 18불이라면, 실제로 손에 쥐어지는 시급은 15%를(3불) 제외한 15불이다. 워홀러가 일을 시작하여 (호주 국세청에 잡히는) 소득이 발생하면 15%의 세금을 물리고, 자동으로 그의 연금 계좌가 개설된다. 하지만 일부 고용주들은 납부 및 서류 작업이 귀찮은 등의 이유로 정부에 신고하지 않는 고용형태를 제안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수용하면 그 고용형태는 이른바 Cash-Job(캐시잡)이 되며, 현금으로 받거나 계좌로 바로 쏴주는 계약 형태가 된다. 연금을 포기하고 간편한 고용 형태의 캐시잡을 하느냐, 연금이 적립되지만 서류 작업 등이 필요하고 세금이 떼이는 Tax-Job(텍스잡)을 선택할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그가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3~5년 전에는 TFN을 이용한 사기도 꽤 있었다. 그 당시에는 호주 정부가 워홀러들의 유입을 장려하기 위해, 워홀러들에게서 걷은 이 15%의 세금을 워킹 비자가 만료될 때에 모두 환급해주는 제도를 실시했다. 그 돈이 얼마나 되겠느냐 싶겠지만, 그가 아는 사례로만 세금 환급액이 4000불이 넘는 경우가 꽤 많았다. 4000불이면 현재 호주달러 환율로 약 320만 원이므로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세금 환급은 워홀러가 직접 비자 만기 시에 신청해야 했는데, 다른 사람의 TFN를 적어내고 그 세금을 환급받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외국인을 많이 접하지 못한 이들은 특히나, 외국인들의 얼굴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호주 국세청 직원의 입장에서는 잘 구분되지 않는 외국인이 세금 환급을 신청하면, 설마 이런 식으로 사기를 치겠나 하며 승인해주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인 워홀러 커뮤니티에서는 TFN 번호를 아무에게도, 특히 고용주에게 알려주지 말라는 글이 많았다. 직원이 1년 동안 일해 쌓인 세금을, 고용주나 TFN을 아는 누군가가 홀랑 환급해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 수법이 불가능해진 이유는, 호주 정부가 워홀러의 세금 환급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세금 환급 폐지 소식을 들은 그는, 호주 정부가 이제 배가 불렀구나 생각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호주는 이제 워킹홀리데이의 성지처럼 여겨지니, 정부 입장에서는 굳이 손해를 감수하며 유인책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2 - 은행 계좌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계좌 없이 살 수는 있으나 너무 불편하다.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계좌와 연동된 체크 카드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 그는 은행 계좌를 개설하면서, 통신사를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은행들을 비교했다. 호주에는 정말 많은 은행들이 있다. 그가 읽었던 대부분의 워홀러들은 Commonwealth bank (커먼웰스)에 계좌를 개설했다. 규모가 크고 지점도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National Australian Bank(Nab)로 결정했다.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커먼웰스는 계좌 개설비가 있었고 Nab는 무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꽤 철저한 짠돌이다.
Nab은행은 계좌를 개설하려는 그에게 매우 친절했다. 백패커스에서보다 더 쉽게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배려에 감동한 그는 Nab은행에 좋은 인상을 갖는다. 계좌는 Savings Account와 Earning Account(이름이 확실치 않다) 두 개로 나뉜다. Saving 계좌는 이자가 높고, Earning은 체크 카드와 연동되어 있다. 돈에 민감한 그는 이자가 높은 Saving 계좌에 돈을 최대한 넣고, 체크 카드가 연동된 계좌에는 혹시 모르니 돈을 최소한 덜 넣기로 마음먹는다.
호주의 금융은 한국에 비하면 굉장히 간단하다. 공인인증서나 공동 인증서 같은 것이 없고 비밀번호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이를 보고 처음에는 너무 허술한 것이 아닌가 했지만, 이후 쓰다 보니 적응하게 된다. 그는 핸드폰에 깔린 Nab앱으로 Saving 계좌에서 그때그때 돈을 송금하여 체크카드를 사용한다.
3 - 국제운전면허증은 그가 한국에 있을 때 경찰서에서 발급했고, RSA(호주 주류 관리 자격증)와 White Card(호주 공사현장 안전교육 이수 증명서)는 호주에서 취득했다. RSA와 White card는 각각 주류를 취급하는 레스토랑과 공사현장에서 일할 때 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일을 하게 될지 몰라 일단 취득했는데, 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가 취득할 때만 해도 이 둘은 굉장히 수월했다. 이름만 자격증일 뿐, 단순 클릭과 그림 맞추기 정도의 온라인 테스트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가 워킹을 시작한 지 6개월 후, Queensland 주(브리즈번이 속한 주)가 이 허술함을 눈치챘는지 두 자격증의 난이도를 높였다. 엄청나게 어렵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중에 이 자격증을 따고자 했다면 시간과 비용이 꽤나 소모됐을 것이다.
1~3의 행정 절차들을 통해 그는 호주에서 사람 구실을 할 준비를 마쳤다. 그는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 철두철미하다고 해야 할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중요한 서류들을 묶어 분산 보관했다.여권 사본 / 비자 승인 문서 / TFN / 국제운전면허 / 그 외 중요 서류들을 각각 2부씩 인쇄하여, 하나씩 묶음으로 2세트를 만들었다. 이 묶음을 각각 캐리어 깊숙이 / 자신이 매고 다니는 배낭에 넣어두었다. 하나는 비상용으로, 하나는 그가 항시 몸에 소지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