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의 햇빛은 따사롭고 외국인들은 풀밭에 누워서 피부를 빨갛게 익히고 있었다. 그는 이력서 뭉치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호주는 커피가 유명하다. 그래서 카페와 음식점이 굉장히 많다. 그가 돌아다니면서 이력서를 직접 건네줄 수 있는 일자리는, 이러한 카페나 음식점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유튜브에서 몇 번이고 본 장면이었지만, 직접 그 상황에 처하게 되니 차원이 달랐다. 유리창 너머로 조심스레 살펴본 상점의 모습은, 그의 존재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상점은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1) 이렇게 활발한 곳에서 나도 저들과 어울려 일하고 싶다. 나도 완벽하게 동화돼서 저런 넘치는 에너지를 풍기며 현지인처럼 되고 싶다.
2) 고작 나 같은 사람을 이 상점에서 뽑아 줄까? 들어갔다가 웃음거리만 되는 건 아닐까? 만약 나를 뽑아준다고 해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방금 눈 마주친 것 같은데, 그냥 여기는 포기할까?
한국에서 모니터 너머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낯선 공간에 쭈뼛쭈뼛 들어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이력서를 건네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결국 그는 몇 개의 상점을 그냥 지나쳤다. 가게가 너무 바빠 보여 기가 죽어서, 직원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다 좋았는데 밖에서 서성거리는 그를 직원이 눈치챈 것 같아서 등 핑계는 다양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지나쳤을까. 그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의 눈에는 한적해 보이는 카페가 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카페에 이력서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멀리서 직원을 관찰했다. 직원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각도에서 보니, 직원은 푸근한 인상의 호주 아주머니 같다. 그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배낭에서 이력서 뭉치를 껴둔 비닐 파일을 꺼내 손에 쥔다. 심장이 뛴다. 상점 안에 손님은 없고 직원 혼자다. 이력서를 건네려면 지금이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다.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순간 "띠링 띵" 울리던 문의 벨 소리를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카페에 들어서자, 그가 멀리서부터 15분간 보았던 푸근한 인상의 호주 아주머니 같은 직원이 그를 맞이한다. 인상이 좋다. 그렇지만 그는 심각한 긴장 상태다. 직원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How can I help you?
(이제와서 이 표현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가 이력서를 내러 왔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유튜브에서 보았고, 그가 속으로 항상 되뇌던 말을 꺼냈다.
Are you guys hiring?
직원은 당황한 듯 잠시 웃더니, 지금은 직원을 뽑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이건 그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이력서를 내러 왔다고 하면 직원은 웃으며 받아주는 것이 그의 시나리오였는데, 시나리오가 틀어졌다.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직원이 먼저 말했다. 지금은 직원을 뽑지 않지만, 나중에 뽑게 된다면 연락할 테니 이력서는 두고 가라는 것이다. 그녀의 친절한 배려였을 수도, 당황한 그의 표정에서 무언의 압박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말을 듣고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이력서를 건넨다. 이력서를 건네는 것 뿐인데, 그는 이미 이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 것처럼 기쁘다. 직원은 이력서를 앞뒤 위아래로 쓱 훑어보며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땡큐 땡큐를 연발한다. 그리곤 마지막에 'Have a good one' 을 외치며 나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직원은 그의 말 하나하나에 모두 답해주며 웃었다.
문의 벨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온 그는, 신바람이 난 것인지 도망을 치는 것인지 빠르게 그 카페에서 멀어진다. 돌이켜보니, 긴장한 나머지 말을 너무 빠르게 했던 것 같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는 이력서를 건넸다는 것 자체만으로 무언가 달성한 것처럼 기분이 뿌듯했다. 처음 자신의 감정은 어느새 망각한 채, 그는 이력서를 주는 것이 생각보다 별 것 아니라며 으스댄다. 벌써 브리즈번의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다. 그는 백패커스로 가면서 몇 군데에 더 이력서를 건네고 갈까 생각하다가, 상점 앞에서 다시 긴장감이 찾아오자 오늘은 이 정도 성과로 충분하다고 위안 삼는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가는 길에 소소한 자축 선물로 맛있어 보였던 과자나 빵을 하나 사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그가 이력서를 건네는 일은 점점 성공률이 높아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도 점점 더 두꺼워졌다. 일주일 전의 그가 이력서를 건네지 않던 주된 이유가 창피함이었다면, 일주일 후 얼굴이 두꺼워진 그가 이력서를 건네지 않는 상점이 있다면 그 주된 이유는 귀찮음이 되었다. 그는 이력서를 돌리는 일에서 나름의 재미를 발견하여, 이력서를 건넨 상점은 마치 자신의 영역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력서라는 깃발을 꽂아 이 상점은 그의 영토라고 표시라도 하는 듯이. 브리즈번 시내의 모든 상점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것도 꽤 재밌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력서가 깃발처럼 꽂혀 있었는지, 그가 상점을 나가자마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주일 후, 그는 어느새 60장의 이력서를 모두 소진하고 도서관에서 40장의 이력서를 추가로 출력한다. 60곳 이상의 상점을 방문하면서, 그는 일자리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온몸으로 체감하기 시작했다. 지금 뽑는 40장도 다 돌리게 되면 정말로 100장의 이력서를 돌리는 셈이 되는구나, 그는 허탈함 반 씁쓸함 반의 감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