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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Dec 26. 2023

26 - 전염병

전염병에 진심인 회사

 그가 입사한 시기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기승을 부리던 때다. 노약자와 어린이에게 치명적이라느니, 한 번 걸리기만 해도 폐에 흉터가 남아서 호흡기 기능이 평생 이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느니 하는 등의 뉴스가 많았다. 그래서 전세계가 마스크를 썼다.


 전염병 자체도 기승이었지만, 이와 동일하게, 아니 오히려 이보다 더 기승을 부린 것은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국가별로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은 전염병 대응이 상당히 강경한 축에 속했다.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사적 모임을 통제하고, 백신 접종 여부를 QR코드로 발행해서 방문하는 상점마다 찍게끔 하여 동선을 추적했다. 말이 권장이지, 백신을 강제한 것이나 다름없다. 백신 QR코드를 받지 못하면 음식점 등 상점 출입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이는 것을 방지하겠다며, 식당에서도 4인 이상의 단체 손님을 받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방법을 찾지 않는가. 4인 이상의 단체 손님들은 3명 단위로 찢어져 바로 옆테이블에 앉아, 모르는 척하고 눈만 마주치며 식사를 했다. 이러한 규제가 실효가 있었느냐, 타당했느냐 여부는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다.



 정부의 정책이니, 기업들은 좋으나 싫으나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터다. 하지만 그가 다니는 회사는, 오히려 금상첨화였던 듯 싶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전염병에 진심이다. 일주일 단위로 전염병 현황 보고가 이루어졌으며, 해당 업무가 상당한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1) 기술팀의 누구누구 사원이 전염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2) 어떻게 걸렸느냐 (회사 내부로부터인지, 가족으로부터인지, 외부로부터인지)

  3) 확진 판정받은 인원과 밀접 접촉한 이는 누구냐 (전후좌우 4방 자리, 같이 식사 여부 등)

  4) 밀접 접촉 인원 전부 전염병 검사 시행, 재택근무

  5) 밀접 접촉 인원 中 확진자 -> 2부터 다시 시행

  6) 밀접 접촉 인원 中 비확진 -> 재택근무, 격리 기간 이후 다시 검사 시행


  이외) 간부 회의, 임원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들은 회의 참석 아침마다 자가키트 시행


 어느 팀의 누가 전염병에 걸렸다 치면, 해당 파티션 전체는 일단 재택근무로 바뀌는 것으로 봐야했다. 확진자/밀접접촉자 하나하나 모두 PPT 장표를 작성해야 했으며, 장표에는 가족들의 백신 접종 여부까지 기재하게끔 되어 있다. 물론, 비협조적인 인원들은 굳이 가족들의 정보까지 적어야 하냐며 대강 써서 제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제출된 장표들은 누가 취합하여 누가 보고하는가? 사업지원팀의 V 차장이 이를 담당했다. 그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V 차장은 신년 휴가 때 남쪽 끝 지방에 내려가서까지도 전염병 장표 취합과 보고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그는 속으로 기겁을 했다.



 그는 내심 재택근무가 하고 싶어, 사업지원팀에서 확진자가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업지원팀이나 관리팀에서는 확진자가 희귀하다. 나오더라도, 식사도 혼자 하고 밀접 접촉도 없었다며 조용히 혼자만 재택에 돌입했다가 금방 돌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회사의 관리팀은 업무 대부분이 상당히 아날로그하여 말 그대로 페이퍼워크(종이를 뽑아 직접 제출해야 하는)가 많기 때문에, 재택근무로는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관리팀 인원들은 혹여나 양성이 나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증상이 있을지라도 굳이 검사를 시행하지 않았던 경우도 꽤 많았던 듯싶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다가 맡은 일마저 없어 책임이 없던 그로서는 이해하기도/파악하기도 힘들었던 상사들의 속사정이었으리라.


 어느덧 회사에는, 기술팀과 영업팀의 자리는 텅텅 비고 관리팀(사업지원팀)만 모두 생존해 있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모두에게 공평할 것 같은 전염병은, 특이하게도 관리팀과 '간부 회의에 참석하는 팀장급'만 피해서 찾아갔다. 

 사업지원팀은 바쁜 현업을 처리하는 와중에, 사업부의 전염병 현황 파악 및 시스템화되어 있지 않은 재택근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걱정하는 데 급급했다. 간부 회의에 참석하는 팀장급들은, 넘쳐나는 회의 아침마다 자가키트 면봉으로 코를 쑤시며 이러다가 코가 뚫려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면봉으로 코를 너무 쑤셔서 찌를 때마다 코피가 난다는 이도 몇몇 있었다.



 직원들은 자조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코가 뚫려버릴 것 같은 회사, 중수본보다 빡센 회사라고. 그리고 마침내, 할 일 없이 지내던 그에게도 전염병 업무가 찾아왔다. 사실 사업지원팀 막내인 그는, 위에 서술이 포함된 잡다구리한 전염병 관리 업무에 내정된 미래 담당자나 마찬가지였다. 


 전염병에 진심인 회사, 전염병 이슈가 생길 때마다 관련 직원들은 모두 전염병 검사를 받도록 한다. 회사에서 시키는 것이니, 비용도 회사에서 지원해야하지 않겠는가. 회사에서 비용을 처리하려면, '전표'를 쳐야 한다. 그렇다면 이 전염병 비용 전표는 누가 치고 누가 취합하고 누가 제출하나?

 사업지원팀 '하얀 얼굴 사원'이 담당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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