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카르마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 얼굴 학생 Dec 26. 2023

27 - 전염병 검사비 전표 (1)

병원에 취업을 한 건가

 처음에 누가 지시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윗선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한다.


  - 이거 검사비용 처리하는 거를 모아서, 사업지원팀에서 처리해. 얼굴이가 진행하도록 해.


 할 일 없이 멀뚱멀뚱 있던 그는 무엇이라도 맡게 되어서 마냥 기쁘다. 자신도 드디어 1인분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그는 주어진 업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 전염병 검사비 전표 처리 업무

 말 그대로, 사업부 직원들이 시행한 전염병 검사 비용을 처리해주는 업무다. 

     1) 시스템으로 전표 작성

     2) 증빙 구비

     3) 전자 결재된 전표를 출력

     4) 구비한 증빙을, 결재 완료된 전표 출력본 뒤에 접착 

         - 딱풀로 전표 좌측 상단 끄트머리만 접착하기를 권장

     5) 완성된 '전표+증빙'을 안전팀에 제출

     6) 안전팀 결재 완료된 전표를 재무팀에 전달(제출)

     7) 재무팀에서 해당 전표 금액이 잘 지급되었는지 마지막 확인


 원래 같았으면 W 사원이 진행해야 할 업무지만, W 사원은 이미 퇴사해 버렸으며 현재는 후임자인 W'2 사원이 W 사원의 업무를 인계받았다. W'2 사원은 지금 정신이 없다. 급박하게 이루어진 인수인계, 그리고 전임자 없이 덜컥 찾아온 첫 마감(바쁜 시기)으로 인해 거의 패닉 상태다. 그런 W'2 사원을 배려하고자 함인지, 전염병 검사비 전표 업무는 그에게 배정된다.



 전염병은 계속 극성이긴 했지만, 회사 차원에서 임직원들에게 검사를 강제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듯싶다. 그가 업무를 맡은 이후, 전염병 검사 전표 처리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매일, 시도때도 없이 직원들이 찾아와 그에게 영수증과 증빙을 건넨다. 안전팀으로부터 전달받은, 전염병 검사비 처리에 필요한 증빙은 아래와 같다. 검사는 3개이며, 검사별로 증빙이 다르다.


  1) 증폭 검사 (가장 강력한 검사, 이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면 통과)

      - 진료비계산서 (혹은 영수증)

      - 검사 결과 증빙 (문자 혹은 병원 출력 서류)


  2) 빠른 항원 검사

      - 진료비계산서 (혹은 영수증)

      - 검사 결과 증빙 (문자 혹은 병원 출력 서류)


  3) 스스로 하는 면봉 검사

      - 영수증

      - 면봉 박스 사진 (가장 많이 까먹는 증빙)

      - 검사 결과 증빙 (한 줄짜리 결과 사진)



 모든 행정/취합 일을 시행할 때 절대불변의 진리가 있다. 메뉴얼을 만들어 공지를 할 경우, 해당 메뉴얼을 지키지 않고 제출하는 이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는 자연의 법칙, 보험에서 다루는 '대수의 법칙' 같다. 무슨 짓을 해도, 이 바이러스 같은 오류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직원들이 바삐 증빙을 던져놓고 가면, 그는 직원들의 증빙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영수증이 빠졌다, 결과 증빙이 빠졌다, 영수증은 있는데 박스 사진이 없다, 결과 증빙이 있는데 영수증 검사 날짜와 맞질 않는다, 검사를 3번 했는데 결과 증빙은 같은 것을 3개 복사해서 붙여놨다 등. 

 사소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오류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사내 메신저로, 필요한 증빙을 다시 요청한다. 해당 직원은 미안해하며 증빙을 다시 제출한다. 바로 가져다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현업이 바쁜지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처리하지 못하고 한켠에 꽂아둔다. 그렇게 꽂아둔 것이 갈수록 쌓이고, 그중에서 하나둘씩 갑작스레 찾아와 다시 증빙을 재제출한다. 종잇더미 속 혼란의 도가니. 넘쳐나는 진료비계산서와 병원 문자 증빙들. 그는 이때까지 살아오며 진료비 계산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설상가상 진료비계산서는 병원마다 양식이 다르며, 가독성마저 떨어진다. 



 쌓여가는 증빙 속, 그는 전염병 검사비 전표를 친다.

- 사내 그룹망 접속, 매입전표 치기 탭 클릭, 화면이 열린다.

- 진료비계산서에서 병원 사업자번호를 찾아내서 입력한다. 없으면 병원 웹사이트를 검색한다.

- 진료비계산서에 써 있는 환자명(직원명)으로 사번을 알아낸 다음 입력한다.

- 해당 직원이 속한 팀 비용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그 직원의 팀이 어딘지 검색한 뒤 입력한다.

- 영수증의 금액을 입력한다. 증폭 검사는 8만 원, 빠른 검사는 3만 원, 면봉 검사는 5천 원대다.

- 회계에 필요한 계정과목을 검색한다. 안전팀으로부터 '건강관리비'로 치라고 전달받았다.

- 전표 처리를 완료한 증빙들은, 그가 만들어둔 '승인 대기' L자 파일로 옮긴다.

- 전표를 치는 동안 몇몇 직원이 영수증을 전달해 주고 갔다. '처리 이전' L자 파일에 넣는다.

- 결재가 완료된 전표가 몇 있다. 출력해서, 해당되는 증빙들을 풀로 붙인다.

- 결재 완료된 전표들을 들고 위의 '안전팀'에 제출하러 간다.

- 안전팀에 가니, 이전에 제출한 전표가 둘로 나뉘어 있다. 이쪽은 증빙이 불충분하단다.

- 죄송하다 하고, 완료된 애들은 재무팀으로, 반려된 애들은 다시 갖고 내려온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눈치가 빠르지 않은 그다. 그는 전염병 검사비 전표를 치면서도 기쁘다. 이게 맞는 건가,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쁘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다. 사업부 다른 직원들 얼굴과 이름을 두루두루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겠지. 검사비 증빙을 가지고 오는 직원들도 다들 친절하다. 비용 처리 잘 부탁한다며, 증빙을 건네고는 떠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본인들이 쓴 검사 비용을 대신 처리하고 환급받을 수 있게 해주는 그에게, 굳이 역정을 낼 일이 뭐가 있는가. 당장은 바쁨과 친절함에 둘러싸여, 그저 기쁘게만 생각하고 있는 그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도 조금씩 의문이 일고 있었다. 


 그냥 본인들 스스로 알아서 전표 치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각자 치면 되는 것을, 굳이 한 명이 몰아서 치려고 하니 괜히 바빠지는 것 아닌가?

 지금 병원에 취업을 한 건가?


 또다시 영수증을 제출하러 온 어느 직원, 상냥하게 그에게 영수증과 증빙을 건넨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신입사원 특유의 환한 미소로 보답한다.

  그 : (영수증을 받으며, 자신에게 할 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6 - 전염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