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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Dec 26. 2023

29 - 명함

세금계산서, 거래명세서, 박스 주기

 홍보팀에서 그를 부른다.


  홍보팀 매니저 : 얼굴님, 바빠요?

  그 : 안녕하십니까! 아닙니다!

  홍보팀 매니저 : 잠깐 와봐요.

  그 : 네!


 홍보팀 매니저는, 자신의 자리에서 그에게 업무를 인계한다.


  홍보팀 매니저 : 저희가, 명함 신청을 받아서 업체에 요청하고, 제작하고 수령하거든요.

  그 : 네!

  홍보팀 매니저 : 이 명함 업무를, 앞으로 얼굴님이 해주세요.

  그 : (막내니까?) 네!

  홍보팀 매니저 : 메신저로 업체 담당자 연락처랑, 주문 넣는 사이트 주소 드렸거든요? 로그인 아이디랑 비밀번호가... 아마 이걸 텐데, 잠시만요.

  그 : 네!


  홍보팀 매니저 : 메신저 드렸어요. 로그인해볼래요?

  그 : (타닥 타닥 타닥) 로그인했습니다!

  홍보팀 매니저 : 여기 보시면 그전에 주문했던 내역들 있어요. 똑같이 설정해주시고, 디자인을 올려야 되는데, 디자인은 저희 디자이너님한테 요청해주시면 돼요. 제작하고 나면, 매월 계산서 발행해서 익월 20일 날 업체 돈 나가게 해주면 되고요.

  그 :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다) 그...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홍보팀 매니저 : 여기 웹사이트에 저희가 명함 신청을 하잖아요? 원래는 신청할 때마다 돈을 내야 하는데, 저희는 한 달에 한번 계산서 발행해서 일괄로 지급하는 걸로 담당자랑 얘기를 해놓은 상태예요. 그래서 매월말에 거래명세서상 계산서 발행하고, 그거에 대한 금액은 익월(다음달) 20날 지급하게끔 하는 프로세스예요.

  그 : (수첩에 적으며) 명함 신청... 제작... 거래명세서... 세금계산서... 그리고

  홍보팀 매니저 : 그리고 익월 20날 대금 지급 이렇게요. 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요.

  그 : 네, 감사합니다!



 명함 업무의 프로세스는 아래와 같다.

  1) 명함 신청자의 명함 신청 (스프레드시트 기입 후 그에게 메신저)

  2) 스프레드시트 신청 내용 확인 후, 디자이너에게 제작(일러스트 tool) 요청

  3) 디자이너의 일러스트 작업 후 작업본 수령

  4) 수령한 작업본으로 명함 웹사이트에 주문 신청

  5) 주문 신청 후 명함 업체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재요청

      - 원래는 결제가 완료되어야 제작이 들어간다. 그의 회사는 결제를 익월로 미루었기 때문에 따로 신청 여부를 알려줘야 한다

  6) 업체 담당자가 주문을 확인하고 공장에 제작 요청

  7) 제작, 제작 완료 후 수령

  8) 매월말 세금계산서와 거래명세서 발행 및 전달 요청 (업체가 발행 주체)

  9) 거래명세서를 증빙으로, 그룹웨어에 인식된 업체 측 세금계산서를 전표 처리

  10) 담당자(하얀 얼굴 사원) 서명, 재무팀 제출

  11) 익월 20날 대금 지급 확인

  12) On and On


 명함 업무는, 그가 초창기에 맡은 업무 중에서는 그나마 돈의 흐름과 관련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인수인계가 너무 간단했고, 기본적인 용어(계산서/거래명세서)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어 이해하기까지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이후 다른 이에게 넘기는 순간까지도,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실무 용어나 프로세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며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그가 앞으로 진행할 다른 업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이해한 개념은 이렇다.

  - 세금계산서 : 물건을 파는 자(공급자)가 사는 자(공급받는 자)에게 발행하는 계산서. 가장 강력한 증빙이므로 금액이 잘못 적혀선 안 된다. 발행된 세금계산서는 약 하루 뒤 자동으로 상대 회사 측 시스템에 잡힌다.

 공급자가 발행하는 것이 보통으로 이를 정발행이라고 한다. 공급받는 자가 발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역발행 계산서'라고 불린다.


  - 거래명세서 : 공급자와 공급받는 자 간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를 적어놓은 명세서. 세금계산서처럼 공적으로 증명된 증빙은 아니나, 거래 당사자의 상호 합의가 전제되므로 이 또한 강력한 증빙이다. 



 세금계산서와 거래명세서 개념을 추가하여, 명함 업무 프로세스를 다시 적으면 아래와 같다.

  1. N월 1일 ~ N월 말일 명함 제작 20건 (명함 1건 당 단가 5,000원)

  2. N월 말일 도래, 세금계산서 발행 (명함 제작업체 측)

      -2) N월 한 달 동안의 거래 명세서 발행, 전달 'N월 명함 제작 20건' 상세 내역 표기

  3. N+1월에 해당하는 명함 신청, 제작 진행

  4. N월 세금계산서 전표 처리, 거래명세서 증빙 첨부 (명함 신청업체 측)

  5. N+1월 20일 도래, 전월(N월)에 발행된 세금계산서와 거래명세서에 대한 대금 지급 (5,000*20건)

  6. N+1월 말일 도래, 당월(N+1월)에 대한 세금계산서와 거래명세서 발행




 그가 인수인계받은 명함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그의 회사는 명함을 기본 200장 단위로 신청했는데, 이를 전달받으면 조그만 종이곽 4개다. 문제는, 종이곽에 주기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종이곽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한두 명이 명함을 신청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청 인원이 많아질수록 일이 복잡해진다. 10명이 신청했다 쳐도, 40개의 종이곽을 하나하나 다 열어서 누구의 명함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명함 업무를 받기 전, 사업부에서는 신년을 맞아 대부분의 직원들이 명함을 단체로 신청했었다. 그렇게 수령한 300개 정도의 조그만 종이곽을, 직원들이 달라붙어 일일이 열어 명함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매직으로 박스 바깥에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런 Show가 언제든지 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홍보팀 매니저에게, 명함 제작 업체에게 이를 요청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홍보팀 매니저는 본인도 요청했었지만 거절당했다며 일축했다. 그가 굴하지 않고 업체 담당자에게 다시 요청하자,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들의 공장 기계는 이미 해당 세팅이 완료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회사 하나 때문에 설비 구조를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스 표면에 구멍이라도 내달라고 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홍보팀 매니저에게, 명함 업체를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홍보팀 매니저 : 그 업체가, 저희 고객사이기도 해요.

  그 : (그게 무슨 상관인지 정말 모르겠어서) 아, 그럼 바꾸면 안 되는 건가요?

  홍보팀 매니저 : 뭐 저희가 명함 신청한다고 매출이 엄청 오르는 것도 아니고, 바꿀라면 바꿀 순 있겠죠.

  그 : (귀가 번뜩인다)

  홍보팀 매니저 : 대신... 지금이랑 똑같은 용지 재질에, 똑같은 디자인에, 비용도 똑같아야겠죠. 한 번 찾아보세요.

  그 : 아, 네.


 언제나처럼, 생각을 그만둔다. 주문한 명함이 도착할 때마다, 종이곽을 하나하나 까서 내용물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매직으로 겉면에 이름을 적는다. 이것도 일종의 손글씨 이쁘게 쓰는 연습이겠지. 이러한 류의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맡은 온갖 업무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멸망스러운 아날로그 감성'을 즐기고자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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