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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Dec 27. 2023

30 - 근무복

 전염병 전표 치는 업무도, 일주일 정도 되니 익숙해진다. 직원들이 매일 제출하는 증빙(진료비계산서/영수증/결과 문자)을 정리하고, 정리가 어느 정도 완료되면 전표를 친다. 나름 바쁘긴 한데, 보람찬 바쁨인지는 모르겠다.



 여느 때처럼, 아무개 부서의 아무개 직원이 사업지원팀에 불쑥 찾아온다.


  아무개 : 안녕하세요. U 과장님 자리가 어디죠?

  그 : 아, 여기입니다.

  아무개 : U 과장님 안녕하세요.

  U 과장 : 네.

  아무개 : 아 저희 그, 근무복을 아직 못 받아서요. 근무복 신청이 됐나요?

  U 과장 : 그룹웨어에 신청하셨나요?

  아무개 : 제가 하진 않았고... 그때 그, W 사원님? 이 했다고 들었어요.

  U 과장 : (시스템 확인 중) 아... 

  아무개 : 저번에 한번, W 사원님이 저희 전체 방에 근무복 필요한 사람들 취합한다고 공지를 했었거든요. 그때 다들 신청했는데, 받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U 과장 : 확인해볼게요.

  아무개 : 아 그리고, 그때 취합 때 신청 못했던 직원들이 몇몇 있는데... ...


 아무개 직원이 돌아간 이후,

  U 과장 : 얼굴아.

  그 : 네!

  U 과장 : 그룹웨어 들어가봐.

  그 : 네!

  U 과장 : 거기 보면, 복리후생 탭 들어가서, '근무복 일괄신청'이라고 있거든. 내가 메신저로 보내준 2명 근무복 신청해. 사이즈는 100으로.

  그 : 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본래 건설업에 뿌리를 둔 회사다. 그가 IT사업부에 속한 것일 뿐, 다른 층에 건설 사업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회사의 시스템이나 문화는 건설에 가깝다. 보통 건설 회사들은, 본사 이외의 여러 (건설)현장을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시스템에도 '현장'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며, 그가 담당한 '현장직 관리 업무'도 본질적으로는 건설 현장의 '파견 기술직'을 관리하는 프로세스가 모태다. 


 그가 면접을 보았던 건설 회사들은, 대부분 건설사 특유의 근무복을 갖고 있었다. 모양은 항공 점퍼와 비슷한데, 재질은 덜 반질반질한 느낌, 굳이 따지자면 항공 점퍼보다는 대학교 '과 잠바'와 비슷한 재질이다. 건설사는 특유의 수직적 문화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결속력이 꽤 강하다. 그러한 연유로, 직원들의 개성은 약간 억누르되 소속감을 줄 수 있는 '근무복'을 도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싶다.



 IT사업부이긴 하나, 건설 문화가 뿌리 깊은 회사의 IT사업부다. 사업부만 다를 뿐 같은 회사 이름 아래 있으니, IT사업부 직원들에게도 근무복이 지급된다. 그가 면접 다니며 보았던 다른 건설사와는 약간 다른, 털이 많은 후리스 느낌의 근무복이다.

 

 이 근무복은 꽤나 요긴하다. 출근 복장이 약간 허술해도, 위를 근무복으로 덮어버리면 그럴싸하게 가릴 수 있다. 다들 똑같은 근무복들을 입고 있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비슷해 보이니, 개성을 표출하기는 힘들어도 자신을 숨기기는 쉽다. 그가 경험한 바로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단체 생활에서 굳이 억지로 튀고자 노력할 필요는 없다. 직원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디자인이 별로네, 전해 들은 단가에 비해서 성능이 별로네 등의 이야기들이 나오긴 하지만 말 뿐이다. 다들 근무복을 상당히 애용한다. 직원에게는 가격도 공짜니까.



 다시 업무로 돌아가서, 사업지원팀에서는 직원들의 근무복 신청까지 도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청이야 해줄 수 있다 치는데, 문제는 수령이다. 근무복의 제작 주문 및 재고 관리는 위층 관리팀 중 '총무'가 담당한다. 사업지원팀은 시스템으로 신청만 할 뿐이고, 결국은 '총무'에서 재고를 풀어줘야 사업부 직원들이 근무복을 수령할 수 있다. 즉, 언제나 그렇지만, 사업지원팀은 중간에 낀 입장이다.


 그가 근무복을 신청했음에도, 총무팀으로부터의 답은 함흥차사다. 근무복 주문은 들어갔는지, 재고는 얼마나 남았는지, 아니 애초에 시스템으로 신청한 내역을 확인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훗날 총무팀 담당자와 친분을 쌓은 뒤 이야기를 해보니, 총무팀에서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총무팀 담당자 : 아니, IT사업부는 어떻게 된 게 현장 전부 합친 것보다 근무복 신청을 많이 해. 이거 원래 현장에서 시공하고 일하는 직원들한테 지급되는 옷이란 말야. 거기서는 또 직접 현장 일을 하니까 근무복이 엄청 낡고 해지고 해도 그냥 입는데. 지금 시스템으로 신청한 IT 사람들 명단 보면 분명 내가 아는 이름이 있거든? 이 사람들 분명 예전에 입사할 때 근무복 받아갔을 텐데. 또 받을 필요가 뭐가 있어. 

  그 : 아, 네 맞습니다... 그런데 신규 입사자를 비롯해서 못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조금 있어서요. 제가 따로 필요한 거를 파악해서 전달드려도 될까요?

  총무팀 담당자 : 그래, 그렇게 해. 근데 이미 근무복 갖고 있는데 또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유를 쓰라고 해. 아 그리고, 공지할 때 그냥 '근무복 신청받습니다' 하면은 모르고 있던 사람들도 너도나도 신청한단 말야. 이거 제작 단가가 꽤 비싼 거야. 다 너네 간접비로 들어간다고. 그러니까 그런 내용을 감안해서 진행하도록 해.

  그 : (간접비?) 알겠습니다.



 사업부와 관리팀의 괴리라고 해야 할지, 근무복 업무는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관리팀에서는 왜 이렇게 신청을 많이 하느냐고 버티고, 사업부에서는 신청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답이 없느냐고 불만이다. 사업지원팀은 그 중간에서 조율을 한다. 사업부의 불만이 터지기 직전 타이밍에, 크게 취합을 해서 크게 불출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고름이 차오르다가 문제가 되기 직전에 한번 짜내고, 이후에는 다시 짜낼 시점까지 차오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고름 자체가 생기지 않는 게 좋겠으나, 사업지원팀은 이를 해결할 힘도 권한도 없다.


 근무복을 기다리던 사업부 직원들의 문의가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될 즈음, 그는 IT사업부 전체 근무복 수요를 재취합하여 총무팀에 전달하고는 근무복을 수령한다. 하복, 동복을 합쳐 대략 100개 정도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회의실에 근무복을 쌓아놓고, 신청 인원의 이름과 수량을 대조해가며 불출한다. 불출을 도왔던 W'2 직원은, 동대문 시장 옷 도매상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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