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피어난 이야기
Cover Photo by 문지아
책, 사람 그리고 나눈 말들
"도서관에 원피스랑 나루토가 있다고?"
스웨덴에 살면서 가장 자주 가는 곳이 있다면 단연 공립 도서관이다. 책을 빌리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는 공간, 마치 마을 전체의 문화센터 같았다. 도서관이라 하면 조용히 책만 읽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웨덴의 도서관은 그 이상이다. 신문이나 프린트 서비스는 기본, 종종 열리는 그림 전시나 아동 및 부모 대상 프로그램까지 없는 게 없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코믹북 존'이었다. 원피스, 나루토 같은 일본 만화가 정식으로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도서관에 이런 것도 있어?" 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잡지, DVD, 게임 등 각종 미디어 자료까지 빌릴 수 있어 도서관은 그야말로 모든 세대를 위한 놀이터였다.
지역마다 도서관 분위기도 제각각이다. 어떤 곳은 조용하고 넓어 스터디 하는 사람들이 많고, 어떤 곳은 살짝 좁지만 아이들 놀이 시설이 갖춰져 있는 활기찬 분위기가 있다.
어느 날은 17살 벨라 양의 사진 전시를 구경했다. 도서관 공식 홈페이지에선 일반인의 전시 일정도 소개해주는 걸 보고 이곳이 얼마나 열린 공간인지 실감했다. 이뿐만 아니라 미취학 아동부터 어른까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독서 모임, 언어 카페, 진로 지도 프로그램도 활발하다.
도서관에서 피어난 첫 번째 한국어
"한국어, 도서관에 입주하다"
나 역시 도서관에서 다양한 프리토킹 모임에 참여했다. 처음엔 스웨덴어 프리토킹, 그다음엔 일본어 프리토킹.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프로그램 목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핀란드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로 운영되는 '언어 카페' 프로그램들 사이에, 한국어는 없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시도한 사람이 없었을까. 이유야 어쨌든, 한국어는 이 조용한 공간 안에서 한 번도 소리 내어 불린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간질거렸다.
'그럼 내가 한번 해볼까?'
그렇게 한국어 프리토킹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어 프리토킹에서 친해진 에녹(Enok)이 통역을 도와주었고, 그의 도움으로 도서관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건넬 수 있었다.
첫 계약임에도 그들은 너무나 흔쾌히 기회를 열어주었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통역이 필요했기에, 에녹의 존재는 더없이 든든하고 고마웠다. 그렇게 나는 프로그램 리더가 되어,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소개했다.
도서관에서는 직접 K-POP 관련 서적까지 준비해 주었고, 우리는 매주 도서관의 한켠에 모여 짧지만 따뜻한 한국어의 시간을 만들어 갔다. 수업에 온 대부분은 스톡홀름 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말투나 억양은 때로는 한국인보다도 자연스러워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한국 드라마와 예능을 줄줄 꿰고 있었고, 심지어 '방탄소년단 뷔' 본명이 '김태형'이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어느새 익숙한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오갔고, 서툰 발음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웃음이 피어났다. 어느 날엔 학생들에게 "한국 이미지 어때요?" 하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홍대 클럽, 부산 광안리 등 술집과 클럽이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그렇게 생동감 있는, 젊고 활기찬 나라로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요즘은 매주 프리토킹에 꾸준히 참여하는 웬델라(Wendela) 양과도 가까워졌다. 그녀는 곧 단국대학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갈 예정이라,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느 조용한 도서관에서 시작된 인연이 한국의 거리에서 다시 이어질 생각을 하니, 이곳이 단순한 책의 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소중한 장소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매일이 작은 문화 축제 같고, 대화 하나하나가 배움이 되는 이 공간에서 나는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시간이 단순한 '언어 연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관심을 기울이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그 경험은 인간적인 연결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뿌듯함도 함께 따라왔다.
스웨덴의 도서관은 참 다정하다. 책을 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배움을 나누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준다. 이곳은 단순한 지식의 창고가 아니라, 이야기가 흐르는 작은 마을 같다. 이 작은 도서관에서 시작된 모든 인연과 이야기는, 내 마음에 오래도록 머무를 한 페이지가 되었다. 나는 따뜻한 도서관 안에서 언어와 문화를 나누는 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