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라이프 스타일 : 라곰(Lagom)
Cover Photo by 문지아
라곰을 담은 빈티지 찻잔 하나
"적당히 낡고, 충분히 예쁘다"
스웨덴에 처음 왔을 때 눈에 띈 건, 도시 곳곳을 채운 수많은 세컨핸드(Second hand) 숍이었다. 'Loppis', 'Myrorna' 같은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지하게 옷을 고르고 접시를 들여다보며 오래된 책을 어루만진다. 처음에는 생소했다. 나에게 중고라는 단어가 때로는 '낡음'이나 '아쉬움'을 의미할 때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스웨덴은 달랐다. 낡았다는 건 '누군가 잘 사용했다'는 뜻이고, 물건의 흔적은 시간의 무게를 의미했다. 그렇게 스웨덴 사람들은 그 시간과 흔적을 존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들의 삶의 철학 라곰(Lagom)이 있었다.
라곰은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적당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부족함을 참지도 않는다. 조금 더 필요할 때는 나누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면 물건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다. 세컨핸드 숍은 라곰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다. 물건 하나하나에 '새 주인을 만나 다시 잘 살아보자'는 따뜻한 마음이 묻어 있다.
스웨덴의 빈티지 가게는 마치 보물 찾기처럼 즐겁다. 길가 모퉁이, 주택가 골목, 지하 1층... 어딘가에 숨겨진 가게를 찾아 들어가면 새것보다 조금 느리게, 오래도록 머물렀던 시간의 자취가 가득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특유의 부드러운 먼지 냄새와 가지런히 정리된 낡은 부츠, 예쁘게 걸린 카디건, 그리고 유독 눈에 띄는 꽃무늬 찻잔을 발견한다. 귀여운 니트 한 장을 발견한 날은 괜히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누군가의 시간 속에 스며든 것 같은 느낌이다. 연보라색 바지에 어울릴 법한 구겨진 리넨가방을 메고 거울 앞에 서면, 이건 꼭 나를 위한 물건 같아 괜히 혼자 웃음이 나온다.
빈티지 가게는 단지 옷을 사는 곳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소비를 배워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덜 사더라고 더 오래 좋아하고 싶은 마음, 예쁘게 남겨진 물건을 다시 사랑해 주는 기분. 가끔은 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둘러만 보다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빈티지 가게는 꼭 뭔가를 사야만 즐거운 곳이 아니다. 그냥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가 걸려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가게 골목을 또다시 걷게 된다.
하늘 아래 같은 색은 없다며 다양한 컬러의 립스틱을 모았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그렇게 소비를 통해 이것저것 채워가던 나는, 어느새 방안 가득 쌓인 옷과 화장품에 짓눌려있다. 이제는 이유 있는 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완벽히 새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다는 걸. 물건도 사람도, 조금 닳고 오래된 모습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어쩌면 '라곰'은 그런 작은 마음들로 이뤄진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이 적당히 포근한 나라에서 오래된 찻잔 하나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만족스럽다.
작은 병 하나의 순환 - 판트 이야기
"콜라 캔 하나가 다시 쓰임을 기다린다"
스웨덴 마트 한쪽 구석, 빈 병과 캔을 들고 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처음엔 낯선 풍경이었다. 다 마신 음료 용기를 굳이 왜 다시 들고 왔을까? 알고 보니 이건 단순한 분리수거가 아닌 '판트(Pant)'라는 이름의 환경 처리 시스템이다.
판트는 음료를 살 때 병이나 캔 크기에 따라 1~3 크로나정도의 보증금을 함께 내고, 반환(재활용)할 때 자동 수거기에 넣어 그만큼을 되돌려 받는 제도이다. 병을 기계에 넣으면 작은 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출력되고, 그것은 다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그저 버리던 것을 되살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쓰임을 더한다. 스웨덴은 이렇게 순환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워간다. 겉으로는 단순한 유럽의 제도 같지만, 그 안엔 '버리기보다 살려내기'를 택하는 사람들의 철학이 녹아 있다. 판트에 익숙해질수록, 마신 병 하나도 쉽게 버리지 않게 된다. 오늘의 빈 병이 내일의 장보기에서 작은 용돈이 되어 돌아온다. '지속 가능한 삶'이란 거창한 구호보다, 마트 가는 길에 병 몇 개 챙기는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쓰레기봉투에 가득 모은 빈 병들을 노숙자에게 건네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길가의 쓰레기통이나 공공장소 주변을 수색한다. 누군가 무심코 버린 병 하나, 캔 하나가 그들에게는 하루를 살아낼 작은 힘이 된다. 도시의 또 다른 리듬,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그저 그럴 뿐이다.
한때는 손에 쥐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 캔, 한 병 돌려주며 '조금 덜 가지는 삶'이 오히려 꽉 찬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어느새 텀블러를 챙겨 다니고, 가방엔 재사용 비닐이 들어 있다. 이곳에서 소비는 무언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지 않을지를 고민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작은 순환의 시작이, 어쩌면 더 단단하고 부드러운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