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도 모르게 나는 이미 태어나 있었다.
대한민국 한반도, 그중에서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남쪽의 섬, 제주도. 사람들이 보는 제주도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온 나에게
그곳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살아왔고,
그곳에서 슬픔과 괴로움을 모두 겪어야 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태어나 아기였을 때는
못난 곳 하나 없이 사랑받았고,
귀엽고 어리다는 이유로 고통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때 화목했던 가족사진은
이제 창고 구석에 버려져 먼지에 쌓여 있고,
우리 가족은 흩어졌다.
이상하게도 가족이 흩어졌을 때
나는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잦은 이사로
초등학교를 여러 번 전학 다니며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소리 없이 떠나야 했던 순간들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안의 생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오래 다녔던 학교에서 친구가 생겼지만
그 당시엔 휴대폰도 없어서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아예 친구를 사귀지 않기로 했다.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 세상은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시내에서 놀고,
노래방과 PC방을 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함께할 친구가 없었기에
그저 학교에 가면 잠만 자는 학생이었다.
잠시 깨어 있는 시간에는 상상을 했다.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친구와 함께 웃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니, 그만두자.
어차피 세상은 혼자야.’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의 차가운 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은 알아서 차려 먹어.
밥도 아까운 자식, 빨리 집에서 나갔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상처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방문을 닫고
방 안에 갇힌 채 살아갔다.
공부는 내려놓고
그저 휴대폰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여자친구’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함께 놀 수 있는 친구,
그 한 명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결국 할머니 집을 나와
다시, 보고 싶었던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엄마를 만나자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를 구박했던 이유가
엄마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고,
나는 그 미움의 대상 중 하나였다는 것을.
동네에서 손자를 따뜻하게 챙기는 할머니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친구… 나는 생길 수 있을까.’
이미 체념한 채
교실에서 혼자 엎드려 잠만 자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낯설었지만,
그 한마디가 고마웠다.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초등학교 이후로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급식소에 갔다.
그 친구의 무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간절하게 바라던 ‘친구가 있는 삶’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함께 웃고, 함께 놀고,
수학여행도 같이 다니며
나는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혼자였던 나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외로움은 나에게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는 웃고, 울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 싸움조차 서로를 더 깊이 알게 해 주었고
더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평범한 삶을 얻은 나는
또 하나의 욕심이 생겼다.
사랑.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까 궁금했다.
고등학교 이후로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마음이 맞지 않거나,
이유조차 납득되지 않는 이별을 반복하며
나는 결국 생각했다.
‘사랑은 그저 감정 낭비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27살이다.
여전히 내 곁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그리고 엄마가 있다.
그리고 지금, 나보다 다섯 살 어린 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 그 사람은 내가 추구하는 ‘자유’라는 가치에 공감해 주었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싸우기도 하지만 금방 다시 웃는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내 마지막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혼자라고 믿고 있었다.
솔직히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를 부품처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줬으면 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으면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친구들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질 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여러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내 삶은
그저 ‘일, 집, 일, 집’을 반복하는
복사된 하루 같았다.
마치
Ctrl + C, Ctrl + V처럼
같은 하루를 계속 붙여 넣는 인생이었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어린 시절의 힘듦과는 또 다른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진짜로 원했던 삶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해지는 것.
지금의 나는
아직 완전히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은 그에 가까워진 것 같다.
많이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나왔으니까.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5년, 조금만 더 버티면
나도 평범한 삶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