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모임

내맘대로 일기 16

by EAST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모처럼 친한 동기 3명을 만났다. 서로들 시간이 맞지 않아 서너 차례 일정 조정한 끝에 만난 송년회였다. 대학 1학년, 솜털 뽀송뽀송한 때 만났으니 알고 지낸 지 근 40년 세월이다. 이젠 다 흰머리에, 얼굴에도 여기저기 주름투성이다. 현재 직업은 1명은 교수, 1명은 해외 선사(船社) 한국 지사장, 또 1명은 은행 명퇴 후 계약직 은행원. 나는 아시다시피 경비원. 돈은 전직 은행원이 제일 많다. 두둑한 명퇴금 때문이다. 우리가 모임 때마다 이를 알고 자주 노린다. 맛난 거 사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택도 없다. 기분이 좋을 때라야 지갑이 살짝 열릴 뿐이다.


우리가 가까이 찰떡같이 붙어 다닌 것은 2학년 때까지이다. 이후 군대를 다녀왔는데, 1명은 면제, 2명은 현역, 1명은 방위병. 군 복무 기간이 다르다 보니 자연 복학 시기가 달랐고, 졸업까지 달랐다. 그래서 우리의 공통된 추억은 딱 2년이란 세월 속에 머물러 있다.


얘기하다 보니까 흘러 흘러 교수 녀석, 낯선 땅, 미국 유학 가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때의 선택에 대해서 참 무모했지만 돌이켜 보면 참 잘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사실 놀랐다. 학부 전공과는 다른 전공일 줄이야. 그런데 박사까지 따고, 미국에서 교수하다가 부모님 연세가 많아서 지근거리에서 모실 생각으로 귀국, 국내 대학 교수로 부임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듣다 보니 대단하다 싶었다.


해운회사 다닌 녀석도 가세한다. 입사 후 부산 발령받아 내려간 얘기며, 이후 대만 연수를 거쳐 말레이시아 근무 시절 얘기, 또 다니던 회사가 공중분해 되려는 위기와 그걸 막으려고 애썼음에도 결국 사라진 회사, 그리고 현재의 한국 지사장이 되기까지의 굴곡진 삶들.


말도 마. 전직 은행원이 껴든다. 은행 망한 거 겪어 봤냐, 라며, 몸담고 있던 은행이 흡수 합병되고, 피합병 은행원으로서 얼마나 많은 구박과 멸시를 받았는지, 그 박해로부터 꿋꿋이 버텼다며, 열변을 토한다.


연말이라 그런지, 옛 생각을 소환하며 그렇게 웃고 떠들다 헤어졌다. 속에 있는 얘기들을 좀처럼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다들 솔직해진 모습이었다. 얘기하면서 친구들이 매우 치열하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반해 나는 어려운 길을 택하지 않고 피하듯 쉬운 길로만 왔구나, 싶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엄청 큰 시련을 만나게 된다. 그때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당장 힘들다고 시련을 모른 척 회피하거나 다른 길을 찾아 도망간다면 당장에는 피한 것 같지만 결국 더 큰 시련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은행원 녀석의 말을 빌리자면 더 큰 이자가 닥쳐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큰 시련을 극복해 낸 친구들의 모습이 위대해 보였다.


얼마 전 인기리에 끝난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주인공 관식에게 상길은 ‘네가 달랐네, 니가 나랑 달랐네’라고 말한다. 결국 상길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만다. 나도 친구들에게 속으로 똑같이 그렇게 말했다. 마음이 통했나, 1차는 한국 지사장이, 2차는 명퇴금 많은 전직 은행원이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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