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일기 26
시간 되세요?
노조 활동하느라 알게 된 L로부터 온 전화다. 이번에 내가 근무하는 곳으로 4명이 새롭게 들어온다. 그중 한 명이 아는 사람이라고 미리 소개해 준다는 것이다. 근무하는 곳 분위기를 미리 귀띔해 달란 자리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같이 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L은 잊었다는 듯이 새로 오는 사람이 법을 공부했고, OO 대학 출신이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랑 같은 대학이었다. 선배다. 과는 다르지만. 대학교 얘기를 하지 않은 터라 L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이틀 뒤. 새롭게 오는 4명을 4개 조로 편성한 근무편성표가 단톡에 올라왔다. 신입 대원 편성은 전적으로 대장의 권한이다. 설마. 조마조마. 맙소사. 대학 선배 나랑 같은 조다. 대장에게 편성 기준을 슬쩍 물어봤다. 그런 거 없단다. 회사에서 보내 준 명단 순으로 나눴단다. 나이 순도 아니고, 이름 순도 아니고. 이런 우연이 있나.
원래대로라면 같은 조가 아니었을 텐데, 내년부터 나는 조를 옮긴다. 공교롭게 옮긴 조에서 덜컥 만난 셈이다. 이거 난처하게 됐군. 당장 이번 주 만나는데, 이걸 어쩌지, 고민이 되었다.
약속 당일. 두 사람은 미리 와 있었다. 인사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전 직장 얘기부터 가볍게 나눴다. 이윽고 내년부터 같은 조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그런 인연이. 아주 잘 되었다고, 두 명이 환하게 웃었다. 그때 진동벨이 울렸다. L이 가지러 갔다.
기회다. 슬쩍 물어본다. 혹시 법학과? 맞단다. 꿀꺽. 혹시 OO대? 역시 맞단다. 선배님, 저 OO과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이실직고해버렸다. 순식간이다. 바로 고개 숙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임의 권위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한다. 당황스럽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상전 아닌 상전이 되어버린 후임과의 만남. 좌불안석. 나는 2 연타석 홈런 맞은 구원 투수의 심정이 된다.
마침 L이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내년에 사이좋게 근무 잘하면 좋겠네요. 멋모르는 L이 환하게 웃으며 커피를 권한다. 커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