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로또 순례Ⅷ
20년 다녔던 직장에서는 영업을 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광고 영업이었는데, 광고주는 주로 대학이었다. 흘러 흘러 광고 영업까지 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96년 잡지사 편집부 기자로 입사했다. 나라가 휘청댔던 IMF까지 꿋꿋하게 버텨냈던 잡지는 결국 2001년 폐간되었다. 그 이후 편집장 선배가 자리 옮긴 대학 광고 영업 전문 회사로 따라갔다. 그곳에서 계속 잡지 만드는 일을 했다. 하다 보니 하루 종일 앉아서 교정, 교열 보는 일이 너무 답답했다. 틀린 문장 고치고 또 고치고, 울화통이 터졌다. 안 되겠다 싶어 밖으로 다니는 영업 쪽으로의 전직을 희망한다, 신청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2005년 무렵이던가. 그때부터 광고 영업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콧바람 쐬니 너무 좋았다. 시간이 뚝딱 지나갔다. 신나게 다녔다. 그러니 매출도 쑥쑥 올랐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사장, 여기도 한번 해보라며,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을 뚝 떼 줬다.
부·울·경 지역은 신규 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영업 담당자가 있었지만, 워낙에 다른 쪽 담당 지역이 많아 부·울·경 지역은 1년에 한두 번 갈 뿐, 거의 방치 상태였다. 전임자는 내게 넘겨주면서 먼 곳, 실적 없는 곳이라 미안하다, 고 했지만 홀가분한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부·울·경 지역 출장길은 4박 5일 일정이다. 월요일 가서 금요일 돌아오는 머나먼 길이다. 경로는 두 가지. 울산 먼저 가서 양산, 부산 거쳐 김해, 창원, 마산, 진주 돌아 서울로 오거나 또는 그 역순으로 가는 방법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갔다 오면 왕복 1,000km나 되는 먼 거리다. 거의 국토대장정 급이다. 기차 탄 후 렌터카를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다니는 곳이 시·도를 여기저기 넘나드는 거라 렌터카 이용 불가능 판정.
이번에는 울산 먼저. 편도 340km. 소요 시간 약 5시간. 오전 7시, 일찍 수원 집을 나선다. 먼 길 대비해 미리 집에서 내린 진한 아메리카노 향이 좋다. 자! 이제 출발. 경부 타다 상주영천 거쳐 다시 경부로 내려오는 코스다. 가도 가도 좀처럼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듯하더니 정오 지나 드디어 도착. 오늘 일정은 울산 네 곳을 다니고, 저녁쯤 부산 입성이 목표. 그러려면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울산, 생각보다 성과가 좋았다. 잘하면 한두 곳 잭팟 터질듯한 분위기였다. 그중 한 곳은 담당자가 광고비만 잘 조정해 주면 100% 진행하겠다고, 당연히 조정 가능, 내친김에 광고 집행 구두 확정까지 받아둔 상태. 일사천리였다. 기분 좋게 부산 입성. 서면역 부근으로 숙소 잡았다. 서면역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교통이 편하다. 부산 대표적인 유흥지로 사통팔달, 다니기 편하다. 두 번째는 아주 중요한 이유인데, 전국에서 로또 1등 당첨이 제일 많은 곳으로 꼽히는 부일카서비스가 지척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서울 상계동에 있는 스파라는 곳과 1, 2등을 다투는 곳. 로또 원투 펀치인 곳이다.
부일카서비스가 있는 범일역은 서면역에서 지하철로 2 정거장. 숙소에서 나와 범일역으로 향한다. 울산에서의 좋은 성과로 분위기는 한층 UP. 게다가 꿈에 그리던 전국구 로또 성지로 가는 길 아니던가. 먼 길 출장, 여독 따윈 없다. 발걸음이 가볍다. 범일역 도착. 2번 출구로 나간다. 걸음이 빠르다. 마음이 바쁘다. 공연장으로 달려가는 10대 아이돌 팬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싶다. 목적지까지는 500m가 채 안 되는 거리. 2번 출구에서 나온다. 조금 걷다 좌회전. 곧 목적지다. 달리듯 걷는데 발걸음을 급히 멈춘다. 어라! 로또 판매점인데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뭐지? 기웃거린다. 가게 간판이 보인다. 로또 1등 당첨 14번. 앗! 이런 곳이. 뜻밖의 횡재다. 자연스레 줄 선다.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기분 좋다는 증거다. 상호가 돈벼락맞는곳이다. 왠지 예감 좋다. 가던 길 간다. 횡단보도 건너니 곧 부일카서비스가 나온다. 오랜 친구 본 듯 반갑다. 당연하다는 듯이 긴 줄 뒤에 선다. 평일 저녁 퇴근한 사람들까지 가세해서인지 월요일 저녁 7시 무렵, 줄이 꼬불꼬불 길다. 길지만 1등 당첨 상상에 즐겁다. 그런 상상에 긴 줄도 금방 줄어든다. 내 차례다. 상상 속에서 막 세계 일주중이었는데, ‘얼마요?’라는 주인장 말에 현실로 돌아온다.
홀로 늦은 저녁을 먹는다. 내일 일정을 체크해 본다. 부산에서는 2박 일정이다. 소화도 시킬 겸 흥분도 가라앉힐 겸 범일역에서 서면역까지 걸어간다. 오늘 하루가 꿈만 같다. 수원에서 출발해서 이곳 부산까지의 여정을 그려본다. 올려다본 짙푸른 하늘에 희미한 별이 한두 개 보인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 본다. 지갑이 만져진다. 지갑 속에는 로또가 있다. 이번 주 토요일, 주인공이 나였으면 좋겠어, 속삭인다. 서면역이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