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전에 넘어가다

내맘대로 일기 8

by EAST

고소한 냄새가 난다. 부스스 일어난다. 토요일 늦은 오전. 어제 야간 근무 후 들어온 터라 아직 비몽사몽. 어라, 배추전? 생전 처음이다. 아내가 배추전을 다하다니. 놀란 나를 보고 수육하고 남은 알배기가 있어서, 해봤단다. 이런 횡재가. 식탁에 부리나케 앉는다. 젓가락을 든다. 회가 동한지 배가 꼬르륵거린다. 노릇노릇 구워진 배추전. 간장 콕 찍어 날름 먹는다. 기가 막히다. 엄지 척 날려준다.


잠깐만 기다려요, 하더니 이번에는 고구마전이다. 동그랗게 썬 고구마를 튀김가루 묻혀서 기름 두른 후 전 부치듯 살짝 지진 것이다. 기름에 풍덩 빠트린 튀김과는 약간 다른. 고소하고 달콤하고 덜 느끼해서 배추전과 더불어 시골 가면 쌓아놓곤 먹는 내 최애 간식이다.


아내 고향은 전라도. 나는 경상도다. 상상은 금물. 놉, 화개장터에서 만난 것 아니다. 시골 차례상에서 아내는 배추전과 고구마전을 처음 봤다고 했다. 전라도에서는 전혀 본 적 없었다고. 그런 아내도 배추전을 고소하니 맛있다고 좋아했다. 배추에 별다른 양념 없이 그냥 튀김가루만 묻혔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고소한 맛이 날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 시골에서나 먹었지 정작 집에 오면 배추전은 까마득히 잊는다. 사실 맞벌이라 반찬은 시장에서 사 오고, 밥도 즉석밥을 전자레인지 돌려 먹는 판국에 언감생심 배추전이라니. 그새 텅 빈 접시를 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묻는다. 배추 더 없어? 없기는. 넉넉하게 또 갖다 준다. 고향의 맛이었다.


배가 부르니 잠이 살포시 또 쏟아진다. 배추전과 고구마전이라니, 그 와중에 의심은 또 들었다. 왜지? 갑자기. 뒷정리 마친 아내가 옆에 앉는다. 불안하다. 이 느낌 뭐지? 여보. 못 들은 척한다. 어깨를 살짝 흔든다. 마지못해, 게슴츠레 쳐다본다. 저기 있잖아. 어, 그래. 드라이어기가 좀 오래돼서 그러는데. 아하! 이거였구나. 특별 할인해서 30만 원이래.


이때 머릿속을 번쩍 치고 간 격언 한 줄. 위기일 때 기회라고 했던가. 그래 한번 지르자. 점수 한 번 따자. 그거 얼마 한다고 사!(사실 드라이어기 하나가 30만 원이나 한다고, 속으로 엄청 비싸네 했다). 내가 돈 줄게. 30만 원이라고 그랬지. 아내가 당신 돈 어디 있다고, 용돈 쓰기도 힘들 텐데. 10만 원만 줘요, 한다. 옳거니 역시 아내답다. 계획대로다. 아내가 모르는 이번 달 특별 보너스 90만 원에서 10만 원쯤이야 앞으로 배추전 평생 보장으로 쌤쌤이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라이어기는 때깔이 좋았다. 뻥 뚫린 둥근 머리 부분에서 바람이 나온다고 했다. 신기했다. 바람이 무슨 원리로 나오는 거지, 싶었다. 빼꼼히 쳐다본다. 쳐다본들 문과인 내가 알 리 만무하다. 써보니 괜찮았다. 머리도 금방 마르고, 들어보니 머릿결 손상도 덜하다고 했다. 듬성듬성 이제 대머리 일보직전인 내게는 별 차이 없겠지만, 여자들이란 다르구나, 드라이어 하나에 30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이다니 싶었다. 가만, 할인해서 30만 원, 그럼 할인 전 가격은 대체 얼마인 거니, 너란 녀석. 검색한다. 다이O 에어O 코OO 2X. 거 이름 한 번 길구먼. 뭐! 879,000원. 아찔하다. 아내는 돈 10만 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 동의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한방 먹었는걸. 비싼 배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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