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ptain가얏고 Jul 16. 2024

그때는 그랬다

정들면 고향

‘다 필요 없고 몸만 와.’


 부모 재산도 저축한 돈도 없지만 매사 자신만만하고 패기가 넘치던 내 남자의 멋없는 청혼이다. 졸업하고도 공부를 하던 남편은 1997년 12월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의 사태로 인해 서둘러 공기업에 입사 시험을 치렀다.   

   

“합격했어.”

“우와! 부럽다. 축하해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국가 부도 위기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자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찾아왔다.  

   

“중소기업에 들어가기로 했어. 바로 출근하래.”

“뭐 어때요. 어디든 들어가서 일하면 되지.”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드디어 발령이 났어. 우리 결혼하자.”  

   

 아홉수에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통설을 무시하고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남편의 첫 발령지인 원주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부모님 곁을 떠난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두려움도 컸지만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하지만 남편은 새벽에 출근해 자정을 넘겨 들어왔고, 그마저도 12시면 빠른 퇴근이었다. 신입사원인 남편은 언제나 피곤한 몰골이었고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는 날이 많았다. 

     

“아니 무슨 회사가 출퇴근 시간이 새벽이고 휴일도 없어요?”

“나도 힘들다고…”     


 당시 지친 우리에게 유일한 낙이자 삶의 활력소는 치악산 등반이었다.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은 입구부터 계곡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세상 밖 시름을 모두 몰아낸다. 매표소에서 약 15~20분 걸으면 신라 문무왕 6년(66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보인다.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칭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해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구룡사에서 출발해 선녀탕 계곡과 세렴폭포를 지나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산행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장소는 따로 있다. 치악산 입구 아래 적당히 비밀스럽고 시원스레 펼쳐진 계곡은 둘만의 아지트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일주일 열심히 일한 남편을 부추겨 치악산을 찾는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정수리까지 머리칼이 쭈뼛 선다. 바위에 부서져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바람을 타고 경쾌하게 들린다. 너른 바위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다. 뭉게뭉게 피어올라 풍성함을 자랑하는 새하얀 구름이 파란 도화지에 연신 그림을 그려낸다. 한참을 올려다보는데 졸음이 밀려온다.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스르르 내려 감긴다. 

    

“엄마, 저 왔어요.”

고향 텃밭에 쪼그려 앉아 김을 매는 부모님이 보인다. 휘둥그레진 두 눈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얼라,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래?”

“엄마랑 아빠 보고 싶어 왔지.”

“아이고, 잘했네.”

“점심을 굶었더니 배고파요.”

“얼른 들어가 먹자.”  

   

서둘러 차려진 밥상에는 어려서 먹던 음식이 한 상 가득하다.     


“온다고 했으면 시내에서 미리 장이라도 봤을 것을 갑자기 와서 찬이 없다.”

“다 맛있어요.”     


 밭에서 갓 딴 오이와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으니 상큼하다. 호박을 썰어 넣고 구수하게 끓여낸 강된장과 호박잎도 별미다. 얼음을 동동 띄운 새콤달콤 오이냉국까지 들어가자 더위가 저만치 달아난다.      


“역시 울 엄마 집밥이 최고야.”     

감탄사를 연발하며 맛있게 먹는데 어머니가 주전자 물을 따라 준다.      

“물도 마셔가며 먹어야지. 체할라.”

‘쪼르륵 졸졸졸… 졸졸졸……’

그런데 물 따르는 소리가 멈춤이 없다.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살피니 다시금 계곡이다. 남편은 아직 다슬기 잡기에 한창이다. 깜박 졸았는데 그새 꿈까지 꾸었나 보다. 멀리 고향까지 다녀와서인지 더욱 시장기가 돈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남편을 부른다.  

   

“여태 잡고 있었어?”

“하도 곤히 자서 깨울 수가 없더라. 배고프다. 밥 먹자.”

준비해 온 김밥을 입에 몰아넣으니 다람쥐 마냥 양 볼이 통통하다. 우적우적 씹으며 짝을 향해 말한다.

“여기는 사람도 없고 정말 좋다.”

“나도 맘에 들어. 그리고 이것 좀 봐. 잠깐 잡았는데 요만큼이네. 다슬기가 많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온통 둘만의 세상이다. 

    

 강원도는 집 밖을 나서기만 해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다. 텐트 하나로도 훌륭한 숙소가 된다.

“저기 다리 밑이 시원해 보이네.”

“물도 깨끗해서 수영하기 좋겠다.”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인데 수영 실력을 뽐내고 싶다. 겁도 없이 물안경만 끼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수경에 바로 물이 차서 눈을 뜰 수가 없다. 건너편 바위까지는 상당한 거리로 겨우 도착했지만 기어오를 힘이 없다. 허둥대는 모습이 불안했는지 앞서 도착해 있던 남편이 끌어올렸다. 다이빙은커녕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민망함에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이게 다 수경 때문이야. 물이 들어와서 앞도 보이지 않고 옷은 무겁고…”     


 나이가 들수록 추억에 의지해 사는 것 같다. 남편과 거의 20년 가까이 여러 발령지를 전전했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처럼 낯설었던 강원도 원주가 이제는 또 하나의 소중한 고향이 되었다. 가장 편안했고 돌아가고픈 시절이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곳이다. 살아가며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동반자가 곁에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우리 치악산 계곡 생각나지?”

“응, 참 좋았는데, 아직 그대로겠지? 궁금하네.”

“시간 내서 한 번 다녀올까? 아들이랑 같이?”


 유난히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올여름은 맑고 시원했던 치악산 계곡물이 더욱 그립다.

작가의 이전글 어른을 위한 동화(별을 닮은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