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 점포장 리더십(3편)

by 그루터기

사실상 대기발령 중이던 옥 실장이 당점 점포장으로 화려한 복귀를 하는 내용의 문서가 도착했다. 늘 그래 왔듯이 강대리의 상급 책임자들은 물론 일선 창구직원들도 각자의 안테나를 세웠다. 선임 여직원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대리급 점포장’이란 말부터 나왔다.


신임 점포장은 첫 출근 이전에 이미 1호 지령을 내렸다. 지점 현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우선 유선과 FAX로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잔여 예산과 일정한 규모 이상의 거액거래 법인 리스트 등이 포함되었다. 가장 중요한 소속 직원들의 신상 등 인적사항에 관해선 본부 주관부서로부터 이미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다. 강대리도 이리저리 나름 옥 점장에 관해 정보를 모았다. 거칠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페이퍼 워크를 좋아하고 다변이며 좀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출신 지역색에 얽매인다는 거로 대략 요약이 되었다. 책임자들에겐 기존 고객의 이탈 방어는 기본이고 소개를 통한 외연 확장(MGM)은 물론 직원 개인의 인맥을 통한 신규자금의 유치도 요구한다 했다.


한때 강대리와 같은 부서의 근무 인연이 있는 우대리는 재미있고 우스워 죽겠단다. 초급 서무책임자 호출용 벨을 점장실에 새로 달았는지부터 물었다. 향후 단단한 각오를 해야지 직장 생활을 견디어낼 것이라 했다. 강대리의 본적인 300번지 말을 빌자면 "말똑 꼬솝다 “고 했다.


얼마 전 서울 강서지역 ●●●지점의 초임 책임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현 점포로 전보되어 이제 중참을 넘어 고참대리를 목전에 둔 강대리로선 만감이 교차했다. 당점 직전 점포장 치하의 생활도 그렇게 녹록지 않았는데 이제 좀 좋은 시절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흔히 잘 등장하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을 또다시 되뇌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향후 벌어질 지점 생활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점에 부임하기도 전에 서무책임자를 불러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 직전 근무 점포로 개인 봇짐을 가지러 오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향후 옥 점장 치하 생활도 그리 만만치 않아 보였다. 종래 부서장직에 근무 중 부진한 영업실적이나 민원 등을 이유로 사실상 결재 라인에서 비껴선 대기 발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시 이렇게 점장 자리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3 요소도 작용한 것으로 보였다.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시되는 3김 중의 한 사람이 본인의 고교 선배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우고 자랑한다는 소문이 사람보다 지점에 먼저 도착했다.들리는 소문을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점장실에 비치할 물건을 고를 때부터 알아보았다. 벽걸이용 화이트보드의 사이즈와 디자인을 꼭 찍어주었다. 휴지통은 개폐용 발판을 밟아 덮개가 열리면 A4 용지를 접거나 구기지 않고 그대로 버릴 때 걸림이 없이 한 번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요구했다.


매분 기마다 영업실적을 분석하고 차기 계획서의 작성을 요구했다. 분량은 최소한 20쪽 이상이어야 했다. PC를 다루는데 재능이 별로 없는 강대리로선 난감했다. 아래 사원에게 컴퓨터 작업을 늘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일과시간은 물론 퇴근 후 주말까지 할애하여 초안을 작성하는 일은 당연히 강대리의 몫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된 출력본을 들이밀면 서너 쪽 정도를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별 내용이 없는 껍데기뿐이라는 코멘트를 하며 보고서를 휘익 집어던졌다. 나름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심혈을 기울인 강대리는 허탈했다.


초급 책임자인 대리급 직원 업무분장을 6개월마다 새로이 했다. 직원들에게 맡기는 업무를 옛 왕조시대의 임금이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에 아무 게로부터 일을 빼앗야겠어’라며 입술까지 깨물었다. 이는 얼토당토않은 사족이었다. 점장이 일을 주는 것에 대해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받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였다.


무릇 영업기반이나 영업력이 부족한 책임자나 점장일수록 각종 회의 횟수가 많고 시간도 길었다. 그 전형을 옥 점장에서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회의 횟수와 시간은 영업력과 반비례하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 지적이었다.


오늘은 점심 교대 후 외부로 법인 영업을 나서는 강대리를 불러 세우며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강대리를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이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강대리와 당사 첫 거래의 인연을 맺은 A법인의 대표는 강대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은행권 대비 압도적으로 높은 수익을 지속적으로 안겨주니 어쩌면 이는 당연했다. 박대표를 소개받은 옥 점장은 우리 책임자들은 기존 거래처 자금이나 빼먹고 앉아 있노라 말문을 열었다. 먼저 제 얼굴에 침 뱉는 웃지 못할 푸념을 했다. 과연 이 사람이 진정 조직의 단위 부대장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이제 중견을 넘어 선임 점포장 정도라면 본인의 연고 거래처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본인을 좇아 제주도까지 따라올 수 있는 충성고객도 확보해야

함이 마땅했다.

영업점의 살림살이를 도맡고 점장의 수행비서 정도의 역할을 하는 지점 서무 대리 겸 법인 영활동을 같이하는 강대리가 놓치지 말고 챙겼어야 했다. 그런 전례와 관행이 없다 보니 익숙지 않은 것은 놓치기 쉬운 것인가 보았다.

사이즈와 디자인까지 지정하여 어렵사리 장만한 화이트보드 월별 행사 계획란을 달이 바뀔 때마다 세심하게 살폈어야 하는데 강대리로선 역부족이었다.


업무 마감 후 갑작스러운 점장의 호출에 강대리는 눈썹을 휘날리며 점장실로 들어섰다. 엄청나게 큰일이라도 생겼는 줄 알았다. 부동자세로 긴장하여 무슨 질책을 받거나 지령이 떨어지려니 초조하게 기다렸다. 갑자기 본인의 양복 안 주머니의 장지갑을 꺼냈다. 최저 단위 정액권 수표 한 장을 불쑥 강대리에게 건넸다. 외모와 달리 예민한 부분도 있는 강대리지만 이번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순간, "이런 서무책임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점장의 생일도 챙기지 못하다니" 혀를 끌끌 찼다. 죄송하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인근에 자리한 도깨비란 이름이 붙은 재래시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누른 소머리편육, 순대, 각종 튀김을 조달하는 동시에 창구 여직원에겐 축하용 생일 케이크의 준비를 부탁했다. 이리하여 급조된 현장 생일파티는 마감되었다.


화이트보드의 오늘 날짜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공란이 아니라 ‘Happy Birthday!!’라 적힌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영어 실력이 짧이서라기보다는 윗분을 깍듯이 잘 모셔야 하는 이른바 정무감각의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점장의 생일 축하연을 내년엔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챙기기로 했다.


오늘은 갑자가 꿰어 맞추어 그런대로 무난히 넘겼다. 점장이 퇴근한 후 사태의 전말을 전해 들은 직원 모두는 키득거렸다. 결국 강대리는 점장에게 옆구리를 찔린 셈이었다.


당시까지 근속연수보다 그 이후 훨씬 오랜 기간 같은 회사에 재직 중인 강대리는 그 이후 다른 부서장 생일잔치를 챙기거나 부서 차원의 점장의 생일잔치를 별도로 판을 벌인 기억은 없었다. 다만 생일자들을 한 달 단위로 모아서 부점 단위 간단한 생일파티를 여는 점포는 드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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