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교수와 사단 마라톤 대표선수

by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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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제기랄! 좋아, 탁 교수와 마라톤으로 한번 붙어 보자. 내가 이래 보여도 사단 마라톤 대표선수였단 말이야. 내가 탁 교수 정도는 자신 있게 이길 수 있거든.”


이번 학기 상법개론 과목에서 권총을 찬 민호 형의 넋두리였다. 형은 적어도 30개월 이상의 짧지 않은 세월을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우리 현역 친구들과 입학 동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입학 동기인 예비역 형’이었다. 형은 법학과이었지만 행정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행정고시 시험이 벌써 코앞에 닥쳤다.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수업에 거의 출석을 하지 않았다. 통학 시간과 수강 시간을 아껴려 학교 앞 독서실에 자리 잡고 시험 준비에 올인했다.


교양, 전공 필수 과목의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형은 강의실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중간고사와 기말시험 준비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잘 정리된 동기들 노트를 복사하고 교과서 참고서 등을 총동원하여 요약을 하거나 모범 답안지를 근사하게 만들어내는 실력이 있었다.


18년간의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로 볼 수도 있었다. 대학 강의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의 출석을 일일이 체크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일정한 출석률에 미달할 경우엔 교내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믿기지 않던 전설이 아닌 현실이었다.


교수에 따라 학생의 출석 체크 여부나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을 자랑하는 교수는 학기 내내 출석부를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그렇지 않은 교수도 있었다. 강의 시간마다 매번 꼬박꼬박 빠뜨리지 않기도 하고 한 학기에 두 번 정도 형식적인 체크에 그치는 교수 등 다양했다. 출석률을 일정 부분 성적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법 담당 탁 교수는 한 학기 중 2번 정도 출석을 체크했다. 자신의 강의 시간에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 학생에게 시험 자격을 빼앗지 않았다.


다른 과목은 강의실에 개근을 하지 않더라도 학점을 따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탁 교수의 상법개론 강의는 아주 달랐다. 민호 형 스타일의 평소 시험 준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탁 교수의 강의 기법은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시험 출제방식도 당시로선 아주 파격적인 스타일을 고집했다.


50분이 1시간 강의의 기본 단위였다. 시험시간도 50분이 대세였다. 그러나 상법시험 시간은 120분이 주어졌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는 그것이 아니었다. ‘ ~을 논하라. A와 B의 차이점을 비교 설명하라.’ 등이 일반적인 출제경향이었다. 그러나 탁 교수는 판례를 중심으로 하는 케이스 문제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였다. 형이 요약이나 모범답안지를 잘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이런 경향의 문제에는 통하지 않았다. 탁 교수의 강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직접 듣지 않고선 답안지 작성이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기존 판례를 약간 비틀거나 변형하여 케이스 문제를 탁 교수만의 독특한 취향대로 고안해 냈다. 국내는 물론 심지어 일본 판례도 강의 범주에 들여놓았다.


120분이란 긴 시간이 배정되다 보니 문항 수나 메꾸어야 할 답안지 분량도 이에 맞추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학기 내내 강의했던 내용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고득점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배점 기준으로 크고 작은 문제를 골고루 배치했다. 그러다 보니 한두 문제를 찍어 운이 좋게 적중할 경우 고득점 하는 요행은 아예 꿈을 꿀 수 없었다.


이에 형은 이번 학기 최종평가에서 40점이란 과락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F 학점으로 재수강이 확정되었다. ‘쌍권총은 두 자루다.’라는 서부영화 제목의 패러디가 떠올랐다. 형은 두 자루가 아닌 한 자루의 권총을 차는 영광을 얻었다. 이번 기말시험 상법 문제를 접한 룸메이트 선배는 ‘하버드법대 시험문제’가 아닌가 하며 혀를 내둘렀다.


오늘 오전에는 행정고시 합격자 명단 발표가 있었다. 이번 합격자 명단에 형은 아쉽게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에 우리 현역 입학동기 서너 명이 형과 함께 학교 앞 일번지 생맥주집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아직 정오까지는 30여 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주점에 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로 형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행정고시 관련 이야기와 탁 교수에 관한 것이 메인 안주가 되었다. 우리는 차수를 변경해 가며 몇 개의 주점을 옮겨 다녔다. 농촌, 아방레물, 나그네파전 등 모교 대학촌에서 내로라하는 주점을 오늘 하루 동안 섭렵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러던 중 2층에 자리한 주점을 오르내리는 계단참에서 형은 다른 손님과 시비가 붙었다. 몸싸움으로 발전하기를 우리는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현역 동기들이 형과 상대 손님을 떼어놓느라 진땀을 뺐다.


"무어가 죄송해? 우리가 저 사람한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야, 너희들 탁 교수에게 전해라. 마라톤으로 겨루자고. 내가 상법은 몰라도 마라톤은 잘 뛸 수 있어."

형은 이번에 자신에게 과락을 안긴 탁 교수와 방금 전 시비가 붙은 손님에 대한 불만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풀고자 했다.


탁 교수는 앞으로 계속해서 아예 출석 체크를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자신의 강의 시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학생들은 고득점은커녕 권총을 찰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일반 논술형 문제와 달리 케이스 문제는 완벽한 이해가 없으면 답안지를 제대로 메꿀 수 없었다. 케이스 문제가 각종 국가고시의 대세가 된 지금이다. 마라톤 부문에서 탁 교수는 형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탁 교수는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남다른 혜안이 있었음을 우리 동기생들은 이제야 모두 인정했다. 케이스 문제란 답안지에 아무리 많은 분량을 옮기더라도 논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엉뚱한 동네에서 계속 헤매는 꼴’이 되었다. 과락을 받아 들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형의 마라톤 실력이 상법 학점을 따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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