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생선회를 즐기는 황 점장은 오늘도 수협공판장의 단골 회집을 책임자 회식 장소로 정했다. 이미 다른 책임자의 양해는 사전에 구해 놓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화요일 일과 후 오후에 열리는 정기 책임자 주간 미팅을 마치고 이곳에 모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들렀다. 점장은 비교적 원거리에서 출퇴근을 하는 2명의 책임자에게 오늘 시간이 되느냐부터 물었다. 번개팅 회식이 성사되었다. 가성비가 높은 맛집이었다.
점장은 지난 주말 공판장에 잠시 들렀는데 자연산 광어 6 킬로그램 짜리를 구경했단다. 그게 아직 팔려나가지 않았으면 오늘은 이 큰 생선으로 회식을 하자고 긴급 제안을 한 것이었다. 곁들이찬, 야채, 매운탕을 먹을 여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차라리 생선회를 한 점이라도 더 맛있게 먹는 것이 낫다는 게 점장의 지론이었다. 생선회 마니아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책임자 회식을 마친 후 합숙소로 돌아온 직원들은 이미 잔뜩 솟아오른 배를 쓰다듬었다. 그럼에도 야식으로 라면을 해치우는 막강한 식욕을 자랑했다. 평소 다른 음식보다 생선회를 유난히 좋아하는 박 과장은 이 지점 근무 덕분에 싱싱한 활어회를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행운아가 되었다.
독신자 합숙소에는 박 과장이 이곳에 부임하기 전엔 2명이 기거하고 있었으나 인사발령으로 5명을 거쳐 최고 7명까지 늘어났다. 회사에서 도우미 아주머니의 인건비와 전기 수도 가스요금 등을 부담하고 주식이나 부식비 등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때라 기거하는 직원들이 회비라는 이름으로 갹출하여 부담했다. 미혼의 독신자나 원거리 단신 부임자들을 위해 회사에서 직원 복지의 일환으로 국내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이러한 제도를 도입했다.
식사와 세탁 청소 등을 도우미 아주머니가 전담했고, 입주직원들은 고맙게도 Y셔츠 등의 다림질 서비스도 받았다.
박 과장은 누구보다 코를 심하게 고는 터라 입주 초기부터 이를 이미 알아챈 민대리는 ‘코파’와 ‘비코파’로 나누어서 방을 배정하자는 제안도 했다. 지점 회식이 있는 날이면 단골 2차ㆍ3차의 좋은 장소가 되다 보니 합숙소는 불야성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오락으로 불리는 고스톱판을 벌이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이 지역의 점포가 3개로 늘어나자 우리 지점 직원뿐 아나라 타 지점 직원도 입주했다. 점점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다른 게임도 마찬가지이지만 고스톱판에선 선수 각자의 특기, 장기, 습관 등이 잘 드러난다고들 했다. 같은 패 두장을 들고 숙성시킨 후 한 장을 던지면서 "자 어떻게 대처하는가 보겠습니다"라는 수를 이미 읽고 있었다. 우계장은 "박 과장, 같은 패 두장 들었구먼"으로 응수를 했다. 작전도 꼬리가 길면 바닥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장대리는 GO라고 부르는 대신 ‘돌 아부 쳐’를 외쳐댔다. 박 과장은 ‘안 보고 돌아’라 외치지만 이미 상황을 파악한 다음의 수순이었다. 자고로 고스톱 경기에선 ‘견제’와 ‘자제’가 필수라는 것이 박 과장의 평소 지론이었다. 한편 이 시점에서 박 과장은 ~~~~라고 말을 미룰 때는 견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시그널로 보아도 좋았다.
바둑 경기 국가대표급 대국에서 신의 한 수라고 불릴 정도의 패를 내리쳤을 땐 ‘독사 같네’라는 추임새가 주위에서 훅 들어왔다. 이에 합숙소는 졸지에 지리산 뱀사골로 변했다.
지점 회식장에서 이미 마음껏 들이 켜다 보니 피로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모퉁이 방 한쪽에서 벌써 꿈나라로 행차를 나선 직원도 있었다. 이런 직원도 잠을 깨워선 경기장에 입장을 시켰다. 기분 좋게 응하지 않을 경우엔 한쪽 다리 끝을 번쩍 들어 바닥에서 질질 끌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고스톱판엔 항상 술판을 벌였다. 이 행사는 새벽 두세 시 정도에 파했다. 심지어 밤을 꼬박 새우는 올나이트도 가끔 있었다.
이런 이벤트가 마무리된 후에도 박 과장은 정상적인 출근은 물론 외곽 법인 영업활동도 강행했다.
박 과장은 주말을 할애하여 민방위 훈련 시 강당의 맨 앞줄에 비치된 접이식 의자에 앉아 강의를 열심히 수강했다. 전날의 수면 부족으로 인한 밀려오는 졸음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앉은 자세에서 상체만 앞으로 엎어졌다. 차디찬 강당의 매끈한 콘크리트 바닥을 양손 바닥으로 짚고선 그때서야 아차 하고 알아차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고스톱 경기중 판돈이 모두 떨어져 이른바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IMF 구제금융을 받듯이 동료직원으로 터 현금을 차입했다.
정예 멤버 세 선수가 골방 수준의 제일 작은 귀퉁이 방에 모였다. 광을 팔아주는 금융비용이 없이 죽기 살기식 시스템으로 치열한 경기를 이어갔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출근하는 바람에 새벽이 온 줄을 알았다. 본의 아니게 불시에 등화관제 훈련을 했다.
이튿날 박 과장은 외곽 법인 영업활동 파트너인
민대리로부터 점심식사 후 좀 쉬었다 가자는 부
탁을 뿌리쳤다. 전일 음주와 고스톱 경기로 인
한 피로와 수면 부족을 뒤로하고 거뜬히 일정을 소화했다. 박 과장은 ‘강철체력’이란 추임새도 들었다.
합숙소 멤버들은 아침과 저녁식사는 합숙소에서 해결했다. 점심은 지점 내 구내식당의 신세를 지는 게 보통의 스케줄이었다. 퇴근길에 동행하는 우계장은 저녁식사나 간단히 하고 가자고 박 과장에게 자주 졸라댔다. 말대로 식사만 하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식사 후엔 술자리로 이어지는 게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러다 보니 합숙소의 밥솥엔 백반이 항상 여유롭게 주인을 기다렸다. 박 과장이 도우미 아주머니의 음식이 자신의 입에 맞다고 하자, 최대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위생상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지점의 책임자 회식이 공식 종료된 후 추가로 지원자만 동행하는 술자리가 2, 3차까지 이어졌다. 오늘 이 풀코스를 완주한 합숙소 정규 멤버가 아닌 민대리가 밤늦은 시각이 아닌 새벽 이른 시각에 초인종을 눌러 댔다. 같은 방을 쓰는 최대리는 박 과장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 것을 요구했다.
30대 후반의 박 과장이 다른 날과 달리 숙소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잠시 숨을 고르던 중 별다른 일정이 없는 것을 벌써 눈치챈 우계장은 인근 주점 순례를 나가자고 졸라댔다. 박 과장은 이를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나섰다.
주점 안주인과 족보 내지 호구조사 등을 했다. 자신이 박 과장 고향 후배와 고교 동기임이 밝혀졌다. 태어난 곳이 충청북도이지만 충북도청 소재지 보단 충남도청 소재지가 거리나 교통 여건상 훨씬 편리했다. 보통 도회지로 나간다 하면 충청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이 도시엔 고향이 같은 사람을 가끔 만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박 과장은 신용카드를 애용하지 않았다. 술값의 일부를 따로 장부에 올려가며 진도를 많이 나갔다. 안주인은 혹시라도 부실 채권이 될세라 사무실로 독촉 전화도 연결해왔다. 고향 여자 후배가 나중엔 안주인에게 ‘아하 박 오라버니구나’라고 했다고 전하는데 향후 좀 자중자애해야겠다는 반성도 했다. 주점 안주인은 박 과장의 고향 동기의 형과 세기적인 연애도 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박과 장보다 입사일은 몇 개 월, 연식은 2~3개 정도 아래인 비 책임자 중 선임 우계장은 명문가 집안 출신에 명문대 인기학과를 졸업했다. 공군 장교로 전역한 화려한 스펙을 자랑했다. 회사 측에 맞서 노조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잦은 전보발령을 겪었다. 이 지점에 박 과장 같이 전입을 왔다. 근속연수가 비슷한 다른 직원들 대비 근무지를 자주 옮기다 보니 좀 어려운 처지였다. 회사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요주의 인물로 관리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다 보니 입사 동기를 비롯하여 동일 직급 동료 직원은 물론 책임자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친인척이나 학교 동문도 아닌 박 과장에겐 유난히 살갑고 깍듯하게 예우를 했다. 주위에선 이를 두고 의하 해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던 중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대표 선수 격인 송 부장이 발을 벗고 나서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타 직원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왜 유독 박 과장의 조언이나 충고는 잘 새겨듣고 두 사람 사이 케미가 좋은 이유가 무엇인가” 말해 보라고 졸라댔다. 사실 그건 ‘국가기밀’이라고 하면서 귓속말로 진정성 있게 성실한 답변으로 돌려주었다.
‘사실 제가 무어 좀 잘 생겼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간성이 좋아서이고 그것도 아니면 모두’ 라고함에 송 부장도 이제야 납득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는 케미가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다.
지방 연고지 점포의 생활은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또 ‘비 오는 날의 수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