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가장 안전한 도피처, 고모네
아버지는 자식을 키움에 있어 항상 신상필벌의 원칙을 잘 지켰다. 오늘도 나는 잘못을 저질러 아버지에게 혼날 일이 생겼다. 이미 불호령이 떨어졌다.
“회초리 10개 만들어 오너라, 어서어서.”
아버지는 누나 둘과 형한테 분부를 내렸다.
“기태야 큰일이다. 아버지 화가 많이 나셨으니 지금 여기 그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빨리 어디로든 일단 피해라.”
평상시와 달리 이런 경우엔 나도 동작이 제법 빨랐다. 누나가 마련해준 퇴로인 안방 쪽문에 가까운 뒷문 바깥 쪽으로 달아났다. 이미 준비된 꺼먹 고무신에 양쪽 발을 서둘러 끼웠다. 300번지 토종 꺼먹돼지 보금자리 인근에 자연스럽게 생긴 ‘개구멍’을 나와 후다닥 고모네로 몸을 숨겼다.
”우리 조카 기태야, 어서 오렴.”
무슨 영문인지 전혀 내막을 모르는 고모는 급하게 도피처를 찾은 나를 두 손 들어 환영했다. 고모네와 직선거리가 아닌 정상적인 경로도 겨우 15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나 고모부의 호통 소리 등도 각각의 상대 집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관내는 물론 군내에선 대목장으로 이미 실력과 역량을 널리 인정받은 고모부가 직접 지은 고모네 집은 비록 초가집이지만 번듯한 건축물이었다. 지금까지 잘 보존이 되었으면 관내 지역 문화재 수준은 족히 될 자격이 충분했다.
대들보나 서까래 등 자재는 천연의 자연무늬를 자랑하는 쭉쭉 곧게 뻗어나간 명품 원목으로 건축물의 뼈대를 구축했다. 주춧돌도 콘크리트가 아닌 자연석을 사용했다. 당시 전통 초가집 대비 천정 높이가 월등하게 높았다. 시원시원한 느낌을 줄뿐만 아니라 안방, 윗방, 사랑방 모두 너른 공간을 자랑했다. 부엌 역시 우리 300번지 대비 2배 정도의 크기였다. 황토흙으로 그 품질을 자랑하는 너른 앞마당에다 뒤꼍도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뒤꼍 울타리 바깥쪽은 고모네 초가집 대지보다 훨씬 높은 지대의 약 반 마지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다른 집 소유의 텃밭이 자리했다. 그 텃밭엔 노송 한 그루가 고모네를 굽어 살피고 있었다. 결코 쭉쭉 곧게 뻗지 않고 주된 몸통부터 자연스럽게 꼬부라졌다. 높이는 적어도 5미터를 넘어섰다.
이 밭의 아래쪽과 고모네 뒤꼍 울타리는 자연스럽게 경계가 되었다. 상당한 높이 차이의 낭떠러지였다. 집중호우가 유난히 기세를 부리는 장마철 등엔 텃밭의 토사가 일부 유실되어 울타리 안 쪽으로 흘러내려 뒤꼍에 쌓였다. 채송화, 봉숭아, 맨 드리미, 뱀딸기풀 등이 무질서하게 섞이고 자주 돌볼 겨를이 없는 덕분에 야생에 가까운 꽃밭에 자연스럽게 객토가 되었다.
지금과 달리 천수답도 제법 있었다. 당시 아주 산골짜기 다랑이 논을 제외한 관내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강물을 퍼올려 일종의 인공 도랑인 보를 통해 물길을 만들었다. 양쪽에 뚝을 쌓았다. 이 보가 신작로 등 도로를 건너야 할 경우엔 지하를 거쳐 물길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흙을 사용하는 보의 다른 부분과 달리 수압을 감안하여 콘크리트 재질로 만들었다. 보의 다른 부분보다 훨씬 바닥을 깊게 팠다. 이곳을 일명 ‘앵꼬’라 했다.
이 앵꼬의 윗부분은 기다란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뚜껑으로 3개나 덮었다. 이곳에서 장난을 치다가 물에 빠져 곤혹을 치르기도 했고 심지어 드물게 익사사고도 일어났다.
고모네 집은 가시나무 등으로 두른 울타리와 바로 이 보의 한쪽 뚝과 사이 공간으로 난 ‘편도 2인 보도 전용 사잇길’에 접한 삽짝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었다.
‘산너머 쪼봇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라는 노래 가사가 딱 어울렸다. 고모네 뒤쪽 울타리 앞의 내리막길로 가위를 떨거덕거리며 엿장수가 등장하면 해동이 되어 새봄이 오는 전갈이었다. 이 풍경은 나의 머리엔 스냅사진을 넘어 이미 화석화되었다
.
장마철 물분 낚시에 등장하는 대나무 아래 부분 3배 정도 굵기 통대나무로 사각을 두르고 말린 싸리나무 가지로 네모 안 부분을 촘촘히 채웠다. 네변 통대나무 부분을 칡넝쿨로 칭칭 감아 만든 독특한 삽짝 문이었다.
이 삽짝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서서 시계방향으로 풍경을 조감하듯이 파노라마를 돌렸다.
비록 같은 재래식이지만 300번지 대비 두배 정도 공간과 용량을 자랑하고 지푸라기 소재의 가마니를 ‘타개서(해체하여)’ 사방 벽을 두르고 주워 모은 함석 조각으로 지붕을 대신한 재래식 화장실이 자리했다.
이 화장실 뒤편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이르는 울타리는 고모네 초가집 건물의 전면이었다. 가시나무 울타리 안쪽으로 여나무 그루의 옥수수 줄기가 들쑥날쑥한 간격으로 키재기를 하고 있었다. 건물의 오른쪽 끝부분인 사랑방 정면 울타리 안쪽엔 두세 그루의 대추나무도 이름을 올려 울타리 역할도 겸했다. 오른쪽 끝을 돌아 뒤꼍엔 야생에 가까운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뒤꼍 모퉁이 공간엔 300 번지 대비 반 정도 규모의 장독대가 자리를 차지했다.
고모의 만년 주특기 메뉴는 고춧가루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무청 부분만 싹둑 잘라 담근 시큼한 맛이 일품인 품목이었다. 다름 아닌 세기적인 천연 웰빙 건강음식인 ‘싱건지’였다. 이를 잘 모시고 있는 호리병같이 낄죽한 항아리도 눈에 들어왔다.
학창 시절 주로 막내형이 사용하던 사랑방엔 고모부가 약주를 자제하고 모처럼 심혈을 기울여 손수 만든 원목 책상과 의자가 그 위용을 자랑했다. 앉은뱅이책상이 대세이던 당시 관내에선 이런 것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이야기되는 유명 브랜드의 원목 가구 윈조라 해도 절대 손색이 없었다. 초등 저학년 시절 아주 단신인 나는 호기심과 부러움에 책상과 한 세트인 의자에 앉아 보았다. 발바닥으로 방바닥을 딛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모자랐다.
아버지의 꾸지람을 피해 그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인 고모네로 줄행랑을 친 나에게 고모부 고모 사촌 누나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극진한 대접을 했다. 가을철엔 ‘우리 집에선 줄게 이것밖에 없구나’라며 찐 옥수수를 내왔다. 한겨울엔 고모부가 애지중지하는 놋쇠 화로에 소중히 묻어둔 군 고구마를 꺼내 노란색 속살이 보이도록 손수 쪼개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끼니때가 되면 고모가 자랑하는 신건지 김치에다 등겨장을 비비고 동치미까지 밥상 위에 올렸다. 고모부는 놋쇠 화로를 인두로 다독거려 살린 불씨로 기다란 곰방대 끝에 불을 붙였다. 군불만으로 모자라 난방을 이 놋쇠 화로로 보충을 했다. 자칭 국보라고 이르던 양주동 박사의 ‘노변의 향사’에 다르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계절이 맞을 경우엔 뒤꼍의 야생에 가까운 꽃밭에 빨갛게 얼굴을 내민 뱀딸기도 맛볼 수 있었다.
고모부는 관내에선 실력과 기술로 이름을 날리는 대목장이나 약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집안 살림은 뒷전이었다. 주업인 목수일을 하는 날보다 공치는 날이 훨씬 많았다. 이러다 보니 큰 형과 누나 둘은 제대로 문교부 혀택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무작정 상경을 하였다. 누나들은 자신들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외화 획득에 동참했다. ‘홀치기’라는 부업도 했다.
막내 사촌 형은 나보다 7년 위였다. 나와 누나들과는 10 내지 15년 정도 연식 차이가 있었다. 내가 이곳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모두 마냥 무장해제가 되었다. 내게 온갖 배려를 다 했다.
큰형은 상경을 결심 후 고모부에게 알리지 않았다. 대신 정신적 지주로 의지하는 우리 아버지인 외삼촌과 상의를 했다. 이러한 일은 엄청난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타계할 때까지 이어졌다.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큰형은 나중에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하여 일정한 수준까지 공부를 마쳤다. 형은 여러 가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한 덕분에 자수성가를 했다.
당시 가난한 집안의 수재들이 전국에서 모인다는 국립 철도 고교에 진학을 한 막내 형에 대한 뒷바라지까지 도맡아 부모의 역할도 큰형은 충분히 해냈다. 막내 형은 학비가 면제되는 국비인 철도고에 대한 자랑을 기회가 될 때마다 들려주었다. 입학 직후엔 수세식 화장실‘ 보일러 등 난방시설, 일정한 수준 이하의 열차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른바 ‘패스 제도’ 등이 단골 메뉴였다. 객지 생활 중 가끔 귀향을 하는 형들은 반드시 고모부를 위해 약주를 준비해야 했다. 미처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고모부의 호통을 견디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꼭 현지 조달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인삼 관련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모부도 우리 집 일을 도왔다. 고모부는 수삼을 건삼으로 만드는 공정 중 소위 "인삼 접는 일"을 했다. 중간 타임마다 여동생이 날라온 4홉들이 삼학소주를 항상 즐겼다. 딱딱한 종이를 돌돌 말아서 남아 있는 술병을 틀어막아 키핑을 했다. 막걸리나 맥주가 아닌 알코올 성분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주만을 고집했다. 세윌이 많이 흘러 당신의 마지막 가시는 노제 땐 생전에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소주잔을 아버지는 고모부 영전에 제일 먼저 올렸다.
아버지는 2남 3녀 중 막내였고 고모는 장녀였기 때문에 출생일이 18년이나 차이가 있었다. 어찌 보면 일정한 기간 큰 누나가 아니라 아버지의 어머니 역할도 했다. 아버지는 태어난 후 9개 윌만에 할아버지가 타계했다. 그래서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만 18세에 집안 살림을 떠안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전혀 없다. 약 15년 위인 친척 누님을 말씀을 빌자면 큰고모는 우리 할머니와 싱크로율이 거의 100% 에 해당했단다.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이런 부족함을 어찌 보면 고모가 차고도 넘치게 채워주었다. 이엔 두 누나나 형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모의 친정 조카들에게 관한 끔찍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고모는 관외로 출타를 하거나 몸이 많이 편찮으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매일 300번지에 들렀다. 때론 하루에 두 번 이상 출근(?)을 했다. 초여름날엔 300번지 텃밭에서 솎아낸 성인 손바닥 1/4 크기의 연두색 상추를 손으로 찢어 넣었다. 어머니가 마련한 된장국에 빛깔 고운 찹쌀고추장을 섞어 만든 ‘고모 표 상추 된장 비빔밥‘을 당신의 친정 조카들과 툇마루에 옹기종기 앉아 먹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초등생 시절 범생이과에 속하는 형을 비롯하여 나와 두 동생 외 당신의 친정 조카들 자랑을 고모는 관내를 넘어 삼천리 방방곡곡 진진 폭포마다 외치고 다녔다. 고모는 당시 문교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고모는 관내에서 공식 인정된 사투리 이외에 당신이 응용하여 신조어 등도 많아 만들어 냈다. 우리 어머니를 올케 대신 ’옳치’로 불렀다. 막내 동생도 이를 흉내 내며 사정없이 즐거워했다. 기름 짜는 집 앞쪽에 나름 신식 건물인, 특정 종교에서 운영하는 비공식 유치윈을 다니는 여동생에게 ‘야 어서 ‘유치장’ 가자 하는 말에 300번지 식구들은 모두 요절복통을 했다.
‘당승냥(주방용 성냥)’,‘뛰깐(재래식 화장실)’, ‘용천하다(마음이 편치 않다)’등은 모두 고모만의 전문용어였다.
초등 5년생인 나는 때 마침 사투리 조사라는 엄청나게 ‘감뿐(힘든)‘ 과제물을 담임으로부터 받았다. 나는 내심 혼자 쾌재를 불렀다. 만약 올림픽 수준의 포상이 이루어진다면 금메달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었다.
이런 자신감 에는 고모의 든든한 백이 자리했다. 고모는 최소한 관내에선 사투리를 가장 많이 알뿐만 아니라 전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응용하여 고모 표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가히 사투리 무형문화재인 고모가 쓰는 용어만 잘 엮어내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고모가 쓰는 일상적인 사투리에 더하여 신조어인 전문 용어 등을 모았다. 이를 ‘야지리(몽땅)’ 5원짜리 공책에다 침을 묻혀가며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 또박또박 적어 냈다. 하지만 사투리로 인정된 건 겨우 10% 내외에 그쳤다. 신조어는 물론 일상적인 사투리로 보이는 용어의 대부분도 고모만의 전문용어이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포상은 커녕 펑가도 하지 않는 예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 별로 노력도 않고 고모 덕분에 날로 먹으려던 나의 행태에 누나 둘과 형은 나름 평가를 했다. “고모가 하는 말이 어떻게 모두 사투리가 될 수 있어?”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 300번지 출신 고모의 큰 조카인 우리 집 형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취업 중 대학원 진학을 했다. 고모 연세엔 고난도에 속하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형의 대학원 진학 사실을 확인한 후엔 아무 거리낌 없이 확성기를 들고 나섰다.
‘우리 친정 조카는 대학원도 다니고 있거든’이라고 외쳤다. 고모는 일상적인 사투리를 응용해서 신조어나 전문용어를 만들어내듯이 조카들 자랑거리를 항상 찾아내고 연구했다.
고모는 약주를 너무나 좋아하는 고모부가 집안 살림살이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평생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냈다. 고모는 좋은 음식은 물론 보통의 먹거리도 조달이 어려웠다. 비자발적인 소식가가 되었으나 오히려 94세까지 장수를 했다. 이는 깊게 생각해 봄직한 테마이기도 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당시 단신이었던 고모와 달리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고모부를 사촌 형제들은 더 닮아 형, 누나 둘은 모두 장신이었다. 큰형과 두 누나는 일찍이 상경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 끝에 자수성가에 성공했다.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기 전엔 큰형도 300번지에 자주 드나들었다. 제사가 유별나게 많은 외갓집에 가면 무언가 먹을만한 것이 항상 있을 것이고 특히 설날엔 떡국을 두 그릇이나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먼 훗날 회고했다.
관내 면소재지엔 유난히도 막내 사촌 형의 남자 동기들이 압도적으로 인원도 많았고 매우 활동적(?)이어서 이곳은 가히 형 친구들의 세상이었다.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집을 나와 행차를 할라치면 형은 나를 꼬셔 항상 동행을 요청했다. 학교 기준으로 6년 선배가 되는 형을 나는 껌딱지처럼 밀착 수행했다. 형의 은밀한 편지를 자신의 여자 동기에게 전해 달라는 심부름을 했다. 비단강 ‘땀빵 여울’행 피라미 낚시에도 따라나섰다. 소골로 땔감나무를 챙기러 간 고모부의 수고를 덜기 위해 ‘나무 마중’에도 동행했다. 지게를 한쪽 어깨에다 헐렁하게 걸치고 박건의 ‘사랑은 계절 따라’와 휘파람을 교대로 불며 여유 있고 좀 게으른 발걸음을 했다. 할머니(외할머니) 산소에 딸린 1/4 마지기 정도의 밭으로 고추를 따러 갈 때도 형은 나를 꼭 불러냈다.
형의 친구들은 모두가 장신에다 통이 넉넉한 나팔바지를 입고 관내 메인 스트리트를 활보하며 각종 뉴스와 화제거리를 줄곧 쏟아냈다. 물을 전혀 먹지 않고 1분에 건빵 10개 먹는 내기, 풀빵 100개 먹는 내기도 고안해냈다. 고교 시절 수학여행비로 기타, 손목시계 등을 구입하고 일행끼리 따로 여행을 다녀온 후 진상이 탄로 났다. 이에 사고를 친 형 친구와 동기들은 부모님을 단체로 찾아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형의 일행은 훤칠한 키에 후리후리한 몸매 덕분에 휘파람을 부는 건들건들 스타일 일색이었다. 마치 특수부대 요원을 선발해 한데 모아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도 무리가 아니었다.
수신:사촌 형, 발신:고모의 편지를 대필하는 과업은 두 누나와 형을 거쳐 내게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종성아 보거라 추운 날씨에 너희 형과 누나덜 모두 고뿔 안 걸리고 근강한지 궁금하구나, 이곳 어미 아비 무탈하단다. 그런데 그 ‘파스(무임승차 타깃, 패스)’는 언제까정 보내줄 수 있는지, 빨리 답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고모가 형에게 직접 건네는 전갈이었다.
다만 글씨를 대신 써주는 역할만 할 뿐인 나는 형에게 차마 이렇게 함부로 반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를 늘 의심했다.
형은 팔도강산 가난한 집 수재들이 모두 모인다는 국립 철도고 입학에 성공했다. 이번엔 형의 모교 차례라고 했다. 학교마다 찾아다니며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사촌 형과 우리 형제들은 우리 창고 집이 자리잡은 5일 장터 평상 위에 모였다. 300번지 출신 형제들과 한자리에 모여 숨을 죽이고 들었다. 프로그램 말미에 초청가수 혼성 듀엣인 라나 에 로스포의 ‘사랑해’를 경건하게 감상했다. 이 노래는 지금도 우리 고향 동창모임의 엔딩 노래로 애창되고 있다.
철도고 재학생과 부모는 완행열차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이른바 ‘패스 제도’가 있었다. 교통비 부담을 더는 혜택을 받았다. ‘반 굉일(토요일)‘도 학습일인 당시 서울과 고향을 왕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형은 유료인 급행열차 대신 공짜인 완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루한 장시간의 여행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형은 자주 고향을 찾았다. 부모와 고향이 그리운 때문이었다.
“외삼촌 저는 그만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가다가 혹시라도 배 고프지 않게 무어라도 사 먹으렴”
아버지는 형에게 1,000원귄 지폐 한 장을 늘 건넸다. 자식은 물론 역시 피붙이인 생질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