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둥어탕국과 어머니

자식 사랑과 형재애

by 그루터기

설날과 추석 차례는 물론 기제사 음식은 지방과 집안마다 차리는 방식이 달랐다. 우리 집도 독특한 방식이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 첫닭이 울기 전까지 모시는 기제사를 마치고 “제삿밥”을 먹었다.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제조할 때 주재료로 사용하는 고두밥만큼 꼬들꼬들한 햅쌀밥이었다. 세면대야보다 약간 크기가 작은 백금색 스테인리스 양푼을 대령했다. 여기에 장정용 고봉밥 서너 그릇을 들이부었다. 무나물, 고사리나물, 콩나물, 시금치나물 등을 아끼지 않고 듬뿍 덜어 넣었다. 깨소금, 참기름, 토종 조선간장 등도 빠질 수 없었다. 고추장, 고춧가루, 마늘 등 자극적인 양념은 절대 금물이었다.


숟가락 하나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두 개의 숟가락을 겹쳐 쓰기도 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밥주걱 등 보다 힘을 쓸 수 있는 도구를 총동원했다.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꼼꼼하게 골고루 섞었다.


나는 평생 이보다 맛있는 야식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담백하고 고소하며 깔끔하기까지 했다. 요즈음 주위에 널린 치킨, 피자, 파스타 등 이런 음식과는 동일 평면 위에 놓고 비교할 수가 없었다. 평균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막내는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누런 니스칠이 된 방바닥 장판 위에 올려놓았다. 시계의 초 분 시침 움직임을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보았다. 자정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럼에도 쏟아지는 졸음을 끝까지 견뎌내고 제삿밥을 먹는 데 성공하는 경우는 별로 흔치 않았다.


쌀 보리쌀 독과 기타 제사 명절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는 공간을 ‘광’이라 불렀다. 와인 저장고와는 달리 지상에 두었다. 터널 비슷한 공간은 그 규모에서 훨씬 미치지 못했다. 좌우 양쪽 상단에는 껍데기를 낫으로 성기게 벗겨낸 원목이 동원되었다. 장정들의 팔뚝보다 좀 굵고 기다란 이 목재를 양쪽 벽의 끝에 자리한 흙벽 홈에 끼워서 만든 선반이 있었다. 동그랑땡, 산적, 송편, 배추전 등을 담은 광주리를 올리기에 아주 딱이었다.


보통의 사무실이나 방 출입문이 여닫이, 미닫이 방식인 것과 달리 이 광의 출입문 겸 뚜껑은 아주 독특한 방식이었다. 나비와 높이 각각 80×25cm 송판 널빤지 여러 장을 아래부터 좌우 양쪽 홈에다 잘 맞추어 순서대로 차곡차곡 끼워서 쌓아갔다. 순서를 헷갈리지 않게 송판마다 넘버링을 하기도 했다.

꼭대기까지 송판을 끼워서 쌓은 후 오른쪽 위에 경첩을 걸고 자물통을 열쇠로 잠그는 잠금장치도 있었다. 우리 집과 달리 벼농사를 많이 짓는 농가에선 이 공간에 가을걷이한 낟 곡식을 가득 채워 넣어 두었다. 뒤주 겸 광으로 활용했다. 제일 위부터 몇 개의 송판 문짝을 열어 버리면 가득 차 있던 곡식 알갱이가 일거에 밖으로 햇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커다란 폭포 물줄기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본래 뒤주란 가구이지만 이런 농가에선 공간 전체가 뒤주가 되어 외형은 ‘광’이지만 실질은 ‘뒤주’였다.


우리 집 광 안은 제대로 된 조명시설도 없어 낮에도 어둠침침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옹기 재질에다 가운데 높이 부분이 불균형하게 뚱뚱한 쌀독 깊숙한 곳에는 노다지가 소리 죽이며 숨어 있었다. 코흘리개 나를 비롯하여 아들 3형제가 식욕이 떨어질 때마다 어머니가 이 보물을 조금씩 떼어내어 죽을 끓여주었다. 설 추석 양대 명절 차례를 지낼 때만 어렵게 구경할 수 있었다.


아주 인색하게 거드름을 피며 가끔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름 아닌 건어물의 황태자 ‘피둥어(피문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6남매 중 차남인 나만 알 수 있는 곳에 어머니가 깊이 묻어 두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이 녀석은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인 내 고향 300번지에선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법 고가의 건어물이었기 때문에 기제사는 건너뛰고 양대 명절에만 차례상에 올랐다.


국물을 제외한 탕국의 건더기를 밥공기만 한 크기의 사기그릇이나 목재 제기에 5개로 나누어 한가득 넘치게 고봉으로 담았다. 떡국 위에 고명으로 올리는 꿩고기처럼 피둥어를 제일 꼭대기에 올렸다. 여차하면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는 듯했다.

깍두기보다는 훨씬 얇지만 표면적은 다소 너른 네모난 무 조각, 무 조각보다는 좀 두께가 있고 직육면체의 수제 두부 조각, 명절에만 구경할 수 있는 순살 쇠고기와 마른 홍합, 피둥어를 함께 넣고 멸치 육수에다 충분한 시간을 인내심 있게 푹 삶았다. 구수한 국물을 우려냈다. 어머니의 정성과 손맛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명품 “어머니 표 탕국”이 드디어 탄생했다.


차례를 마치자마자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음복을 끝내기를 우리는 애타게 기다렸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형제들은 삶은 피둥어 쟁탈전을 매번 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급이 넉넉지 않은 전형적인 수급 불안으로 몸통 차지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다리 두세 개로 만족해야 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형의 제안이 있었다. 명절 차례나 기제사 날이 아니었다. 형제자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보기 드문 우리 가족만의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그 옛날 “어머니 표 탕국”을 노란색의 커다란 들통에다 하나 가득 끓여냈다. 반찬이 아닌 메인 메뉴로 몇 날 며칠 일용할 양식이 되었고 줄기차게 즐겼다. “어머니 표 탕국”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오리지널 음식에 대한 아쉬움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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