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한 수험생활 마무리와 크나 큰 액땜(1편)

노랑머리 부부와 잘못된 만남

by 그루터기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하듯이 20대는 그야말로 더운 피가 끓는 인생의 황금기이다. 그럼에도 그에 걸맞은 큰 고민거리 꼭지가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사정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필생의 과업이 된 국가고시 합격, 병역의무 이행, 연애 문제가 그것이었다.


중학교 입학 무시험 전형과 평준화란 틀을 돌파하기 위해 초등생 시절부터 나는 이미 인근 대도시로 전학을 시도했다. 여러기지 노력을 해 보았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용을 써보았지만 보기 좋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학벌ㆍ학력위주, 출세 제일주의라고 혹자들은 비판을 했다. 하지만 먼 장래의 생존과 더 나아가 최소한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최일선 내륙지방의 작은 분지 중 면소재지에서 태어난 나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안의 형편이나 아버지의 네트워크만

으론 쉬워 보이지 않았다.


형ㆍ누나, 주위 선배들로부터 나름 듣고 배운 바가 있었다. 일찍부터 이른바 ’ 엘리트코스‘에 진입하여 본인의 장래 소망을 차근차근 성취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것이 장래의 생존 생활에 손쉽게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고교는 물론 대학 진학 시에도 한 해씩 늦어졌다. 하지만 최종의 목표인 장래의 꿈을 버리지 않고 불씨를 계속 살려나가려고 기를 썼다.


인지능력. 정신적 총기ㆍ체력 등이 최고조라 할 수 있는 황금 시절 20대라고 하지만 3 꼭지 고민거리를 한꺼번에 모두 감당해내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자주 정부ㆍ문교 정책이 갈팡질팡 했다. 하지만 나는 ㅇㅇ 법대로 진학하여 국가고시에 당당히 합격하고 유능한 법관이 되는 것이 로망이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영재교육 과정은 없었다. 하지만 이른바 세칭 ’ 엘리트코스‘ 란게 엄연히 있었다. 초등시절부터 주위로부터 듣고 보고 느낀 바에 의하면 우선 이 코스에 진입하는 거야말로 최종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데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의 기나긴 학창 시절과 수험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제대로 된 공ㆍ사교육을 받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자면 대도시, 특히 특별시로 일찍이 진학하는 것이 첫걸음이었다. 그래야만 모든 면에서 최소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3남 3녀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한 뙈기의 땅도 물려받지 못해

빈손으로 자수성가를 한 아버지의 역량에 전적

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8명 대가족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나를 초등시절부터 대도시로 유학을 보내는

것은 쉬워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래도 좀 다행이었다. 특별시는 아니지만 10대 도시엔 넉넉히 그 이름을 올리는 교통의 요지인 대도시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장차 특별시로 가는 중간 디딤돌 역할을 하기에는 그리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향(면소재지), 인근 대도시, 특별시로 점차 자리를 옮겨 학교를 다니게 되면 원대한 최종의 꿈을 이루는데 그렇게 어려움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코스 이동’이 무난하게 이루어지리란 기대도 했다.


이윽고 나는 인근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를 마치고 학부 4년, 석사과정 2년을 모두 소진했다. 그럼에도 국가고시 최종 합격에 이르지 못했다. 준고시에 1차를 통과한 후 2차 시험을 앞두고 수험생활 내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혀온 것은 병역문제였다. 그동안 여러 번 연기를 해온 군입대일이 코앞에 닥쳤다. 2차 시험을 칠 기회도 살리지 못한 채 이제야 끌려가고 마는가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오늘도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 3세트 고민 뭉치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며 당돌하게 병무청 당직실로 전화 연결을 했다. 대중가요 노랫말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가 아주 잘 어울렸다. 천만 다행히도 2차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줄뿐더러 일단 2차 시험 합격자 발표일까지 입대를 미룰 수 있다는 뜻밖의 아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전공은 속일 수 없었다. 기쁜 나머지 추가로 물었

다. 그 근거란 게 법, 시행령, 행정규칙 중 어느 것인가가 궁금했다. 내부 방침(지침)이란 답이 돌아왔다. 행정법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 재량‘도 일조했다.


그래서 본적지 관할 병무청에 준고시 1차 합격증을 제출함으로써 2차 시험 응시 기회를 합법적으로 얻게 얻었다. 그나마 겨우겨우 불씨를 살려나갔다. 징병검사 연기 중인 대학 4학년생이 꼭 받게 되는 ’ 의무 신검‘에서 나는 이미 ’ 1종 갑‘으로 현역

입영대상자 판정을 받은 바 있었다. 그간 신체

의 변화를 이유로 재검을 받아 보충역 입영 대

상으로 재분류되었다.


준고시에 최종 합격할 경우 비록 법관에 임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10년간 군법무관으로 복무한 뒤엔 변호사로 활동이 가능한 차선의 코스였다.

넉넉하지 못한 2차 시험 준비 기간이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이 철철 넘치도록 한꺼번에 들어붓는 고난의 행군을 했다. 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전공이 아닌 하나의 교양과목에서 과락(38.33점)으로 고배를 들었다.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법학도들은 대부분이 이른바 '수필가'로서도 일정한 역량을 갖추기 마련이었다. 큰 문제 하나와 작은 문제 두 개를 모두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문에서 출제가 되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학창 시절 시험에선 예상 문제 풀에서 벗어난 문제가 출제될 경우에 온갖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럴듯한 수필이라도 쓰고 나면 과락은 넘는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50점 배점인 큰 문제 하나만이라도 이런 임기

변의 실력을 발휘하여 수필 수준이라도 제출

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랬다면 아마 필시 내 성의를 가상히 여겨 채점관이 만년필 잉크 값어치 정도 점수는 주어 최악의 경우 과락선은 너끈이 넘겼을 것이었다.


만일 해당 과목에서 40점 이상을 얻어 과락을 면

했으면 다른 과목의 점수가 여유가 있어 당당히 합격이 가능했다. 이를 두고 주위 친구들은 “상준이 너는 본래 인성교육이 문제인데 그중에도 특히 윤리가 그렇잖아?” 라며 위로와 아쉬움이 담긴 농담을 건넸다.


오랜 세월 수험생활을 일단 접은 후 나는 이른바 향토사단이 소속된 신병교육대의 3주간 군사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고향 군내 인근 연대급

부대로 배속이 되었다


부대 내의 내무반 생활이 없이 자택에서 부대로 출퇴근하는 형태의 근무로 병역의무의 이행을 갈음하는 것이었다. 현역병 대비 비교적 수월하고 부담을 많이 덜어낸 형태의 병역의무 이행의 고난

의 장정에 올랐다


첫 출근을 앞둔 주말 오후 나는 절친 성호를 만나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소나무가 많은 부락으로 향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나섰다.


아무런 부담이 없는 고향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도로변 인근 음식점 옥상에서 크게 술자리를 한판 벌였다. 훈련기간 동안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 겸 나는 거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이어 맞은편 다른 친구의 자택으로 자리를 옮겨겼다.


아무런 양념도 없었다. 살아 있는 미꾸라지에 썰지 않은 모두부를 함께 섞어 넣은 후 삶아낸 후 그저 심플하게 초고추장에 통 미꾸라지를 찍어 안주로 삼았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멋들어지고 투박하며 건강한 메뉴로 2차까지 마감을 했다. 우리 친구들은 황토흙 마당의 한편에 자리 잡은 너른 펑상에 각자 편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그 흔한 나무젓가락도 마다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산 젓가락으로 미꾸라지를 집어 흡입했다. 무더위가 좀 누구러지기 시작한 8윌 말경이었다.


학부 4년, 한해 밀린 대학원 과정 도합 7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소진했다. 그럼에도 국가고시에 최종 합격을 하지 못했다. 일정한 수확도 없는 거의 빈손으로 낙향한 신세였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고 좀 울컥해지기도 했다.


절친 상호의 동생은 “형님, 이제 시작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라며 걱정과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렇게 늦은 20대 중반을 넘어 종반에야 병역의 의무를 치르게 되었다. 애로가 많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우려가 있었다. 이에 반해 부대 안의 사병들과 너무 많은 격차의 연식이기 때문에 나름 예우를 받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격려도 있었다.


소나무 부락 친구들이 베푼 푸짐한 환영회를 마쳤다. 나는 성호와 함께 관내 소재지로 코스 이동을 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향후 병역의무의 이행에 관한 전망과 대책을 성호와 논의했다. 그간 쌓인 회포를 마저 풀고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할 겸 새로이 둘이 마주 앉았다. 초등시절 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초째좀빵‘과 우체국 사이의 중간 즈음에 자리한 ’ 초원다방'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로선 도무지 또렷한 기억이 없었다. 잠시 전 우리가 차를 마시러 4인용 테이블의 쿠션이 좋은 의자에 자리를 잡은 기억까지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와 달리 다방 한 켠의 창가 기다란 소파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관내 메인스트리트 농협창고 앞 신작로 한복판으로 장면이 넘어갔다. 나와 성호는 이른바 노랑머리 부인(X), 남편(Y) 등과 한데 엉켜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위치와 상황이 연속해서 바뀌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보기 드문 사태가 벌어졌다. 신교대 훈련소 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고자 아무 부담이 없는 고향 친구들과 편한 상태에서 술을 들이켠 결과였다. 이른바 필름이 끊어진 것이었다.


훈련기간 중 헌병대 교육시간에 이미 많이 전해 들었다. "귀관들은 이제부터 군인 신분이고 따라

군법을 적용을 받기 때문에 민간인 신분 당시

와 달리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라”

는 당부를 누누이 받은 적이 있었다.


훈련소를 나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더구나 첫 출근을 하기도 전인데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 나올 법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몸싸움 중간중간 바로 곁에서 지켜보던 같은 부락의 아저씨ㆍ아주

머니들은 큰소리를 치며 기를 쓰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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