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한 수험생활 마무리와 크나 큰 액땜(2편)
노랑머리 부부와 잘못된 만남
"총각들, 저 사람들을 패면 아주 큰일이 날 거야. 부디 제발 참게나"라는 흔치 않은 주문을 했다. 복잡하게 엉킨 우리 일행과 상대편을 떼어내고 뜯어말리느라 온 힘을 다 쏟았다.
노랑머리 일당이 이른바 자해공갈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수험생활은 일단 접기는 하였지만 향후 앞길에 방해가 되는 오점이 남겨서는 아니 될 것 같았다. 엉켜진 상태를 어떻게든 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보았다. Y는 나의 멱살을 더욱더 조여 오고 지속적으로 달려들어 우리 측의 성질을 돋우려는 짓거리를 이어갔다.
인내의 한계를 느낀 나는 "어이 상호야, 저 인간들 죽을 정도로 갈겨버려라" 라 외쳤다. 노랑머리 일당은 나의 멱살을 잡고 계속 흔들어대는 등 몸싸움의 강도를 의도적으로 한층 더 높여 상대방의 이에 맞서 폭행 등을 유도해 자신들이 상해를 입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먹으로 우리 일행의 얼굴들 가격하지 않으면서 때려 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화를 돋웠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별로 힘이 실리지 않은 자신의 손빠닥으로 나의 뺨을 연신 두들겼다.
비록 20대 종반이지만 상호는 당시 체력이나 힘 펀치의 강도로 보면 관내는 물론 군내를 통틀어도 손가락을 꼽기에 충분했다. 내 주문대로 노랑머리 일당을 향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하였을 경우엔 "대형사고"로 발전했을 것이었다. 그 후 사태의 수습은 쉽지 않을 듯했다. 주위 사람들의 적극적인 만류와 나와 상호의 기대 밖의 자제로 엉킨 상태를 풀었다. 겨우겨우 몸싸움은 진정되었다. 더 이상의 불상사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상호는 나에게 이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소나무 부락의 환영회를 마친 우리는 초원다방에 들어섰다. 상대적으로 술에 많이 취한 내가 건물 밖의 화장실을 다녀왔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마침 창가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노랑머리 부부는 손님으로 먼저 같은 다방 안에 들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부는 무료한 나머지 오늘도 어디 좋은 먹거리가 있을까 호시탐탐 노리던 차였다. 나를 좋은 먹잇감으로 지목했다. 술이 덜 취한 상호가 나와 동행한 사실까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이때 나는 취한 나머지 화장실을 오가며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높은 고함을 질렀다. 이러니 이 부부는 아주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Y는 이것을 놓칠세라 아주 그럴듯한 가공의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내가 화장실에 도착하여 같은 장소 인근에서 먼저 도착해 볼일을 보던 자신의 부인인 노랑머리 Y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리저리 밀치며 '강제추행'이란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내 절친 상호가 만약 현장에 없었더라면 Y가 이렇게 구상한 시나리오에 기반한 공작에 나는 꼼짝없이 말려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이번 일로 아버지에게 모든 신뢰를 잃었다. 노랑머리 부부와의 몸싸움은 진정되었으나 그다음이 더 큰 문제였다. 노랑 부부와 우리 일행은 파출소로 힘께 자진 출두했다. 각각 진술서를 작성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순식간에 현장으로 달려와 내 뺨부터 세차게 갈겼다.
”야 이놈아, 내가 뼈 빼 지게 고생해서 서울 유학을 시켰는데 겨우 이 꼬락서니야? 많은 세월과 비용을 들여 수험생활을 뒷바라지했다. 시험에 합격하여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기는커녕 이런 시정잡배들과 쌈박질이나 하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
파출소에서 소정의 절차를 마친 나는 일단 귀가를 했다.
아버지의 강도 높은 꾸지람을 받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잠자리에 쉽게 들지 못했다. 다음날 나는 부대로 첫 출근을 하여 길고도 긴 일과를 마친 후 퇴근을 했다. 나와 상호가 이런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소식은 순식간에 관내 온 동네로 번져 나갔다. 이윽고 내 고향 친구 예닐곱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었다. 본건의 진행 전망과 대처 방안 등에 관해 심도 있게 논의를 했다.
“노랑 부부의 짓거리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기회에 철저히 보복을 하자. 이번 일이 터지기 전 관내에선 이 노랑 부부 일당이 자해 공갈단 행세를 한 것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 이에 우리 친구들이 억울하게 엮이어 물질적ㆍ정신적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이번 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친구들은 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가 이번엔 발을 벗고 나서기를 원했다. 본인들이 당한 피해와 억울함도 몇 배로 돌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고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기대를 잔뜩 걸었다.
고향 친구 기철이는, 이번 기회에 상호가 몸싸움 끝에 Y를 한판에 내리꽂았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러면서 자신이 당한 손해와 억울함을 이 기회에 몇 배로 돌려줄 수 있으리라고 큰 기대를 걸었다. 아주 속 시원함을 넘어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만 한편 우리 둘에게 혹시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 것을 내심 걱정했다고 나중에 웃으면서 회고했다.
노랑 부부의 수법은 아주 뻔했다. 사소한 말다툼이 생기면 이 것을 몸싸움으로 키웠다. 상대방의 화를 돋우고 더 나아가 폭행 폭행치상 중상해를 유도했다. 현장과 주변에서 싸움이나 다툼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상대측의 가족ㆍ친구ㆍ친지 등을 한데 엮어서 고소를 했다. 그래서 합의금을 뜯어내거나 벌금과 전과 등의 사법적 불이익을 받게 하는데 아주 능숙한 솜씨를 자랑했다.
본래 외지에서 굴러온 일당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 내자는 고향 주민들의 바람은 점차 늘어났다. 이 문제의 노랑 부부는 각각 사기, 횡령, 폭행치상 등 빛깔과 크기를 달리 한 별을 여러 개 달고 있었다.
노랑 부부와 우리 측 쌍방이 애시당초 합의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과 관련하여 민ㆍ형사상 모든 책임을 서로 묻지 않기로 하면 문제가 없을듯했다. 그러면 파출소에선 본건에 관하여 이른바 사건(사법) 처리를 개시마저 않게 되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랑 부부로부터 이와 유사한 사건에 여러 번 휘말려 벌금ㆍ범죄경력 등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은 내 친구들은 이번에야말로 그들에게 몇 배로 보복을 해줄 것을 나에게 간곡하게 주문했다.
본래 단순 폭행이란 상해의 결과가 없어야 하는데 그게 말이 쉽지, 폭행에 따른 상처가 발생 히지 않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멱살을 잡고 몸을 이리저리 밀치다 보면 주먹으로 상대를 가격하지 않더라도 멍이 들고 피부가 긁힌 자국 등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상처가 전혀 나지 않는 단순 폭행은 ‘반의사불벌죄’라서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공소권이 없어진다. 그래서 종결이 될 수 있는 반면, 상처가 생겨 폭행치상이나 상해죄에 해당할 경우엔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형사소추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건 비록 상해의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실무상 상해진단서를 제출하지 않고 이를 문제 삼지 않을 경우엔 단순 폭행처럼 처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주위의 전폭적인 지원과 응원을 받은 나는 사건 처리를 원하는 쪽으로 진행하는 길 말고는 다른 대안이 별로 없었다. 이번 기회에 친구들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차량편이 여의치 않은 나는 후배 화물차의 도움을 받았다. 읍내 ○외과에 들러 2주짜리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아 파출소에 내밀었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이미 여러 가지 크기와 빛깔의 별을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줄줄이 달고 다니는 노랑 부부는 상당한 관록이 있었고 이 부분에선 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Y는 전날까지도 멀쩡하던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이를 악물며 고의로 골절시켜 3주짜리 상해진단서를 첨부하여 우리를 상대로 파출소에 맞고소를 했다.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상해진단서란 것이 이를 발급하는 의사는 ‘환자의 진술에 의한다’는 단서를 반드시 병기하였다. 진단서를 발급하는 의사는 자신의 책임의 한계를 분명히 할 뿐 더리 상해의 결과가 진단서를 요구하는 자의 자해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가려낼 권리는 물론 의무는 더욱 없었다.
폭행(싸움)에는 정당방위란 게 원칙적으로 인정될 수가 없다. 단지 맨주먹으로 싸우던 중 일방이 흉기를 들이댈 경우엔 그 일정한 한도 내에선 인정되기도 한다. 나는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교과서를 여러 번 정독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더라도 현장 실무 등 경험이 부족한 탓에 세세한 부분까지 잘 알 도리는 없었다.
이에 반해 현장의 실무경력이 짱짱한 노랑 부부는 자신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훈장에 하나 둘 더 추가한들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나나 상호는 이른바 ’ 빨간 줄‘을 처음 올리기라도 한다는 건 치명적일 수 있었다. 노랑 부부는 이미 이런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실을 훤하게 내다보고 대응했다.
이미 건너온 다리를 불살라버린 터라 우리는 뒤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참으로 답답한 처지였다. 우리는 노랑 부부의 화려한 경력 등을 문제 삼아 어떻게든 이 부부를 인신 구속을 할 수 있는가 주위에 자문을 구했다. 2주 상해진단서로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지역사회 내 연대급 부대로 전속된 나는 CP(지휘부) 행정과로 배치되었다. 보충역은 본래 TO(정원제도)가 많지 않기 때문에 주특기를 제대로 받기란 하늘에 별 달기보다 어렵다. 현역으로 입영하였다면 법무나 행정 정도의 주특기를 받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보충역의 핸디캡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 선후배 친구들로부터 자문을 구한 바 자택에서 출퇴근이 비교적 용이하고 격일 근무라서 혹시 틈틈이 책을 볼 수 있을지 않을까 하여 ○경비중대 배치를 지원했다. 이른바 스펙이 너무 아까우니 행정과에서 근무하도록 행정과장은 파격적인 배려와 일종의 혜택을 베풀었다. 주특기가 보병이지만 행정병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 위 규보직‘이란 가벼운 부담까지 감수했다. 나로선 ’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첫 출근일로부터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아 부대 내엔 나에 관한 갖가지 소문이 파다해졌다. 우리식 나이로 얼추 30세 근처에 국가고시를 준비하느라 늦게까지 '게기다' 느지막이 입대한 일종의 ‘고문관’ 하나가 새로 전입을 왔다. 무슨 큰 구경거리나 나선 것인 양 수군댔다.
이른바 효율적인 병력 관리를 위해선지 군인, 특히 사병에게 전속이나 부대 배치, 부대 내 자리를 옮길 때마다 ‘신상명세서’와 ‘나의 성장기’등의 제출을 지겹도록 반복하여 끊임없이 요구했다. 가는 곳마다 사병의 신상을 간부들은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심지어 민감한 개인정보까지 웬만한 신상은 모두 털렸다.
부대 내 본부중대장을 제외하곤 타 중대장은 나의 연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최전방 전투부대와는 달리 내륙의 후방 지원부대였다. 한 계급 낮은 장교가 보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흔하니 이런 상황은 더욱 두드러졌다.
한때 TV 코미디 프로그램 중 병영생활 기간 특히 내무반에서 일어나는 애환을 리얼하게 그린 ‘동작 그만’이란 코너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적이 있었다. 나는 내무반 밖의 동작 그만에서 초임 사병 역할의 연기를 충실하게 해야 하는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