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한 수험생활 마무리와 크나 큰 액땜(3편 완)
노랑머리 부부와 잘못된 만남
내가 부대 첫 출근 직전에 일어난 "노랑 부부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기관으로부터 공식적인 연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내가 근무 중인 부대와 소속이 다른 향 토사단 직할대의 헌병 파견대로부터 호출이 임박했다. 방금 전 나의 소속, 계급과 성명을 확인하는 부대 내 직통전화를 받은 선임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헌병대에서 나를 찾는데 무슨 일라도 있는가라고 혼잣말도 덧붙였다. 잠시 후 사복 차림의 헌병대장이 헐레벌떡 직접 행정과로 행차를 했다.
“행정과장님, 이놈이 신교대 군사훈련을 마친 후 이 부대로 첫 출근을 하기 전이었습니다. 자택 인근에서 민간인과 폭행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서 이렇게 사건이 이첩되었습니다. 이것 참 큰 문제입니다. 우선 데려다 조사 좀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헌병대 사무실로 출두하여 명실상부한 피의자 신분으로 심문을 받았다.
“치고받고 싸운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자해 공갈단으로 보이는 노랑 부부의 술책에 말려들었습니다. 뿌리치거나 벗어나려고만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하자 대장은 고함을 지르며 호통을 쳤다. 거짓말하는 나쁜 녀석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노랑 부부의 범죄경력 등을 익히 알고 있고 사건기록 검토를 마무리한 뒤였다. 대장은 너의 난처한 사정은 충분히 알겠는데 3주의 상해진단서가 첨부되어 맞고소가 되었기 때문에 이른바 쌍방 폭행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사법처리를 면할 수 없다고 했다.
얼마 후의 일이었다. 노랑 부부를 포함한 사건의 실체를 완벽하게 파악한 대장은 나에게 상당히 우호적으로 바뀌었고 대응전략도 귀띔해주었다. 사단 헌병대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소유예’로 빠져나오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내 신상을 훤히 꿰고 있는 대장은 주위 인맥을 총동원하여 연이 닿는 곳으로 하루 빨리 손을 써보라고 했다. 그래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라고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
민간인이 연루되지 않은 군부대 내의 사건이라면 혹시 중대장의 권한으로 15일간의 ‘징계영창’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민간인 측의 민원의 소지가 크고 영창 내에서 체벌이나 가혹행위가 이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본건의 원만한 해결을 하고자 스피디하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부터 연락을 했다. 한때 같은 도서관에서 함께 국가고시를 준비한 인연이 있는 국립 S대 법대 출신 선배였다. 인근 대도시의 지방법원에 현직 판사로 재직 중인 정수형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정수형 자택 인근까지 방문하여 얼굴을 직접 보면서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일단 큰 불길은 잡은 것 같아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안타깝게 잘못 엮인 것 같은데 이런 단순 폭행을 모두 문제 삼자면 일이 너무 많아진다. 당장 인신 구속 등이 이루어질 정도의 중대 사안이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
선배는 조언과 위로를 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검찰청에 출석했다. CP 선임하사는 출두요구서를 두고선 난 여태껏 살면서 평생 이런 것 받아 본적이 전혀 없는데 이게 무슨 망신 이나며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에도 정수형의 도움을 받았다. ○○학교 출신 ●●검사에게 연락을 해놓았다. 별일 없을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S대 법대의 위력을 실감했다. 반드시 출신 대학의 동문이 아니라도 여러 가지 인연으로 막강한 인맥을 자랑했다.
정수와 나는 검찰청으로 들어섰다. 사건 당시
상대적으로 술이 덜 취한 상호의 진술에 더 믿음을 주었다. 검찰에선 노랑 부부의 대단한 이력과 사건의 실체를 이미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찰 수사관은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최악의 경우 약간의 벌금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른바 검ㆍ경 수사권의 조정이 이슈가 되어 아직 최종 마무리기 되지 않고 있지만 당시엔 수사권과 공소권을 명실상부하게 검찰이 모두 쥐고 있었다. 기소편의주의 기소독점주의 등으로 아주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경찰은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어 수사 개시ㆍ종결ㆍ지휘권
이 모두 검찰 몫이었다.
얼마 전 나는 헌병대 출두 당시 검찰에서 이첩이 온 내 사건 기록을 어깨너머로 힐끗 볼 기회가 있었다. 서류철 마지막 쪽의 공간에 검사의 수사 지휘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귀견대로 처리할 것’ ‘재수사할 것’ 등이 눈에 들어왔다. 실로 검찰의 막강한 위상을 실감했다. 이 정도이니 그 많은 팔도강산의 머리 좋다는 젊은이들이 국가고시에 매달리는 이유를 알듯도 했다.
“야 어이 영준아, 너는 앞길에 걸림돌이 생기지 않게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 난 말이야 그까지 것 작은집에 잠깐 들어가 있거나 얼마의 벌금을 내면 그만이거든.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지난번 노랑 부부에게 내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참느라고 아주 혼이 났어.”
라고 상호가 지나가는 소리로 이름에 나는 그저 코끝이 찡했다.
제법 세월이 흘러 나는 군검찰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제법 먼 거리라서 하루를 통으로 비웠다. 이번도 잔뜩 긴장을 한 채 정해진 시각보다 여유 있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헌병대장은 노랑 부부 사건의 실체 등을 보건대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상대측을 주먹으로 가격한 일은 전혀 없다. 그저 뿌리치거나 엉킨 상태에서 벗어
나려고 애쓴 일밖에 없다고 사실대로 진술하라며 나에게 일렀다. 노랑 부부의 범죄 이력이나 사건 당일 현장에서 주위 사람들의 ‘총각들 저 사람들 패면 큰일이 나니 부디 참으라’는 정황 등이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였다.
이번에도 나는 사단 법무부로 출두하기 전 미리 담당 군법무관을 수배했다. 물론 선배 정수형의 신세를 졌다. 본건과 관련 마지막 부탁이기를 바랐다.
“●●판사가 담당 법무관과 통화하는 광경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어. 별일은 없을 것 거야. 잘 다녀오게.”
정수형의 답신이었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던 나를 맞은 군검찰 수사관은 처음부터 아주 비우호적이었다. 나에게 심문을 하면서 윽박지르기도 했다. 때론 무례한 언동도 자신 있게 보여 주었다. 본인의 계급이나 직위 대비 나를 너무 하찮은 존재로 보았다. 자신을 엄청난 권력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나는 피의자 신분인 말단 사병에 불과한걸. 이런 꼴이 보기 싫으면 아예 여기까지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감이 교차하고 자괴감도 들었다.
사람의 일이나 인연이란 것은 알다가도 모른 일이었다. 보기 드문 일이 또 벌어졌다. 피의자 심문 시작 전부터 곁에서 나를 지속적으로 눈이 뚫어질 정도로 지켜보던 해당 계원이 있었다. 중고 참사병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무엇인가 무척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사건 기록의 피의자 신상이 적힌 부분을 뒤적이던 사병은 나를 황급히 밖으로 불러냈다.
‘어이 혹시 자네 영준이 아닌가? “
”예 맞습니다.”
우리 둘은 약 10여 년 전 중부지방의 대도시 자리한 고입 전문 ○○학원에서 이른바 지방 명문고를 목표로 재수를 하던 같은 반 친구 사이였다.
둘은 지금 처지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종우는 나와 달리 목표한 명문고를 마치고 같은 관내의 모대학 법대ㆍ대학원을 거치는 세월을 국가고시 준비에 소진하고 느지막이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었다. 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원수지간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인연이었다.
“이 녀석아 소위 법을 배웠다는 놈이 형사사건에 정식 입건이 되면 군인 신분인 네가 무조건 불리하다는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어? 참 한심하구먼? 갈길이 아직 구만리인데 장차 살아가는데 엄청난 걸림돌이 될 수 있잖아? 이 바보야.”
친구는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주었다.
우리 둘은 부대 내 PX(군 매점)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살아온 각자의 굴곡진 궤적에 대한 나름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다투어 주고받았다. 본래 이곳에 불려 오면 얼차려로 팔 굽혀 펴기 100번과 막사 인근의 제초작업 등 사역을 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너는 네 친구이니 여기 하나 가득 꽃씨를 채집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파격적인 감형(?)을 해준다며 자그마한 봉투 하나를 웃으며 나에게 건넸다.
결국 주위 사람들의 많은 도움으로 나는 다행히 ‘기소유예’란 최종 처분을 받았다. 최악은 면하고 차선이었다. 실형은 아니지만 ‘수사상 붉은 줄’로 취급되는 결코 명예롭지 못한 일생일대의 뼈아픈 기록을 남겼다.
사태 발발 초기에 수도권에서 형 부부와 여동생은 같은 가구에서 살았다. 형은 자신의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고향 본가에 무슨 변고가 있는지 여동생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이는 대단한 육감이었다. 피는 당연히 물보다 진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이후 아버지의 신뢰를 많이 잃었다. 부자간의 이른바 무한신뢰는 한편이 무너졌다. 동네 어르신으로부터 ‘댁의 둘째 아드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는데....’라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인사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자고로 질긴 인연이었다. 종우와 나는 각자 군
복무를 모두 마치고 모두에게 일생일대 과업
이었던 국가고시 수험생활을 접었다. 둘 다 취업전선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L그룹과 D금융기관의 입사 시험장에서 또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 후론 연락이 되지 않는 종우의 건승을 오늘도 빈다.
이번 사건으로 상호를 비롯한 고향의 죽마고우와 끈끈한 우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통합 동창회라는 이름과 기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모임의 기회, 또는 개인적으로 자주 얼굴을 본다. 다른 기수 대비 유별난 우정과 단결된 힘을 보여주어 주위 선후배로부터 시기ㆍ질투도 받는다.
본 사건이 인연이 되어 나는 헌병대장의 쉽지 않은 배려로 파견근무의 혜택을 누렸다. 틈틈이 책을 볼 수 있어 지금도 재직 중인 회사에 입사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아준 셈이었다. 강산이 여러 번 변할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수시로 서로 연락을 하는
막역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헌병대장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데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