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적지인 가곡리 300번지에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쳤다. 초등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300번지에서 보낸 셈이었다. 중학교 이후 길고 긴 학창 시절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골인 고향에서 보낸 이 시절이 아기자기한 추억이 가장 많았다. 자연친화적인 생활이기도 했다.
먼저 학용품 중 미술시간 등에만 필요한 색연필은 종이로 돌돌 감겨 있어 나사 모양으로 풀어서 사용했다. 시커먼 흑연심이 박힌 일반 필기 용도 나무가 아닌 종이로 감긴 품목도 등장했다. 품질이 좀 떨어졌고 사용이 불편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나왕 나무 연필도 있었다. 이 역시 보통보다 품질이 뒤로 밀렸고 고르게 잘 깎이지 않았다.
종이로 감긴 연필, 나왕 나무 연필보다 한 단계 위인 보통 연필이 대세였다. 그런데 이 보통보다 품질이 월등하고 소위 ‘자세’가 나오는 최고급 연필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향나무 재질의 비둘기표 동아연필’이었다. 단가 2, 5원인 다른 물건과 달리 이 귀족은 무려 10원을 호가했다. 면소재지 메인스트리트의 초째좀빵(첫 번째 가게), 조씨네 가게는 물론 많은 세월이 지나 양조장 인근에 생긴 문구점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결코 금수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이 귀족을 항상 정원을 초과하여 모시는 행운을 누렸다. 옆자리의 짝꿍을 잘 만난 것이었다. 관내 행정 최고책임자의 아들을 이웃으로 둔 덕분이었다. 수업 내용 숙제 등이나 기타 요모조모를 도와주는 나에게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친구 진호는 이 물건을 꾸준히 건네주었다. 품위 있는 향내음에다 나무 재질이 좋다 보니 학용품용 문구 칼로 고르고 폼나게 잘 깎였다. 청남색의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에나멜로 껍데기를 장식했다. 공책 위에 글씨를 적자면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혈액형 검사 결과 진호는 나와 같은 B형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집에다 알리기 위해 5원짜리 규격 노트 뒷면에 이 알파벳을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라비아로 13을 불여서 적으면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 어렵지 않은 일인 대필을 해주고 또 한 자루의 보물을 얻었다. 초등 1년인 나도 영어의 알파벳을 알리가 없지만 그저 아라비아 두 글자를 붙여서 적거나 B를 그리면 간단히 문제가 해결되었다. 오늘도 나는 또 한 번 횡재를 했다. 친구 덕분에 내 필통은 이 보물만으로 가득 찼다.
단가 2원인 문구용 칼은 매우 리스키 했다. 종이를 자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연필을 깎으려면 쨍그랑 소리를 내고 부러지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파편이 날아갔다. 연필 대신 손가락을 깎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접어서 칼집에 날을 넣을 수 있는 5원짜리를 사용하는 게 안전하고 경제성도 있었다. 맥가이버칼과 외형은 유사했다. 드라이버 등 기능이 없는 군용으로 추정되었다. 투박하나 연륜을 자랑하는 이 칼로 오늘도 아버지는 연필을 손수 3자루 나 정성껏 깎아 내 필통에 가지런히 채워주었다.
초등시절 두 누나와 형은 가방 구경을 하지 못했다. 대신 책보로 책 공책 필통 도시락 등을 싸서 가지고 다녔다. 형은 오른쪽 옆구리에 끼는 자세로 누나 둘은 레스토랑 웨이터가 써빙 시 쟁반 등을 나르는 자세로 손바닥 위에 책보따리를 올리고 다녔다.
형보다 누나의 자세가 훨씬 많은 힘이 필요했다. 책보를 지참하는 자세에도 이렇게 남녀 구분이 되는 것은 당시로선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3학년까지 형과 같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남자 어린이와 통학 거리가 제법 먼 대부분의 어린이는 어깨에다 책보를 크로스로 묶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빈 도시락 안에 든 수저가 도시락 안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그 바람에 덜거덕 소리는 달음박질에 아주 알맞은 구령이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도시락은 많은 주름과 상처를 입는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우리 형제는 체통을 따져 크로스 자세는 따르지 않았다.
수저를 도시락 안에 넣지 않고 종이 등으로 포장하여 책 공책 등 사이에 가지런히 놓고 책보를 단단히 싸서 묶었으면 간단히 해결이 가능할 듯했다. 그러면 도시락의 수명은 훨씬 길어졌을 것이었다.
초등 4학년 1학기부터 나는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6년 선배인 고종사촌 형이 쓸 가방을 고모부가 마련했으나 형이 애초 원하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가방의 후순위 주인으로 내가 낙착이 되었다. 책보따리보다는 많이 편리했다. 기분도 레벨 업되었다.
그동안 가방을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조르거나 한
적은 없었다. 기본적인 레벨 학용품만 가질 수 있으면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여 운동화나 가방 등에 대한 부러움은 별로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같은 부락 태준이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졸업 시까지 하나의 가방을 계속 아껴 썼다. 나중엔 가방끈이 낡아 끈의 잔해로 남은 여나무 가닥의 실로 끈 삼아 끝까지 버텨내었다. 근검절약 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흑색 연심을 가진 필기용 연필은 연필 상단에 지우개가 장착된 경우가 있는데 양도 적고 성능도 좀 모자랐다. 별도의 네모난 지우개도 흰색이 보통이나 투명한 빛깔이 있는데 후자가 상품이었다. 반으로 잘라 알뜰하게 아껴서 사용했다. 300번지에선 ‘고무’라고 불렀다.
크레용과 크레파스는 이름부터 차별화되었다. 후자가 훨씬 나은 버전이고 콘텐츠가 우위였다. 내용물이 필수인 삼원색을 포함하여 6, 10, 12, 24개 정도의 단계로 나뉘었다. 나는 최대 12개 버전을 썼다. 예전에 비해 피카소 피닉스란 좀 더 고급스러운 브랜드가 나중엔 등장했다. 초등 1학년 시절엔 초보 수준이고 심플한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그리게 하고 우수작은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였다.
그 질기디 질긴 진짜 타이어 표 7문짜리 꺼먹 고무신에서 시작하여 나는 학년을 더할 때마다 문수만 늘려갈 뿐이었다. 하얀 고무신, 노랑 고무신, 앞쪽 코가 뾰족하고 비가 오면 검은색 물이 빠져나가는 검정 운동화, 요괴인간 등 캐릭터가 그려진 고급 운동화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기대 범위를 넘는 것이었다.
4학년부터 특별활동이라는 시간이 새로이 생겼다. 나는 4, 5학년 글짓기부, 6학년 주산반에 이름을 올렸다. 한여름 낮 300번지로 돌아와 고모 표 상추 된장 비빔밥을 배가 터지도록 맛있게 흡입한 뒤였다. 눈썹을 휘날리며 보뚝 길을 지나 초째좀빵에 들러 10원어치 200자 원고지를 사들고 학교 정문을 순식간에 통과했다. 면소재에 사는 어린이들은 학교와 먼 거리가 아니었다. 점심식사는 집에서 해결했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며 점심시간 외출이 막혔다.
소나무가 많이 모여 있는 부락에 사는 한 친구는 미술 시간마다 그 아까운 8절 도화지 한 장을 내게 호의로 건네주었다. 4절지 한 장을 조씨네 가게에서 손에 넣었다. 내게 정확히 반으로 잘라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른 친구에 비해 나의 도화지 절단 솜씨가 마음에 들었다. 반으로 잘려 이제 8절지가 된한 장을 내게 선물했다. 수고에 비해 너무 과분한 보답을 받았다.
고향 9년 선배 여선생님이 2학년 담임 겸 주산반을 맡았다. 주산 연습이 끝난 다음 날 산수 아침 자습 문제를 내게 부탁했다. 감히 어느 분의 분부라고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짧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실하고 성의껏 임무를 마쳤다. 하지만 다음 날 오전에 긴급 호출되었다. 칠판엔 산수 문제 대신 욕설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이는 이제까지 실체가 밝혀지고 있지 않는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한 학년 동안 여름과 겨울의 두 번의 방학이 있었다. 아주 고난도의 단골 테마 숙제인 식물, 곤충채집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는 이 숙제를 한 번도 제출한 적이 없었다.
쓰레기 소각장 청소 총책임자가 된 덕분에 상표 모으기 부문에선 입상 경험이 있었다. 토성 모양의 돌멩이 등을 강가에서 주워 ‘이상한 돌 모으기’ 부문에서 2등에 랭크된 적도 있었다.
부문별입상작들을 선정하여 전시는 물론 포상
도 했다. 부상은 공책과 연필이 대세였다. 순위
대로 리본 모양의 빨강 파랑 노랑의 색종이를
붙여 구분했다.
다른 제목 한편과 우편번호 시행 관련 두 편 글짓기 중 내가 전자에 기대를 걸었던 것과 달리 후자에 노랑 리본이 붙었다. 응시자의 생각과 채점자의 그것은 다를 수가 있다는 걸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먼 후일 국가에서 주관하는 여러 시험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종종 일어났다. 고득점을 기대했던 과목은 저조하고 과락을 걱정했던 쪽은 오히려 선방하는 점수를 받은 적이 예사였다. 시험에선 출제자, 조직 생활에서는 팀장이나 최종 책임자의
의도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방학숙제 중 벼락치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부문이 있었다. 방학기간 동안 매일매일의 날씨를 소급하여 기억하기란 나의 능력 밖이었다. 다름 아닌 ‘일기 쓰기’였다. 지금 같으면 검색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당시론 별도리가 없었다. 날씨를 허위로 적고 일기 쓰기 숙제를 하면 될 것을 융통성이 없고 허풍은 더욱 기대할 수 없는 내 성격 탓이었다. 방학 숙제는 물론 학창 시절에 못다 배운 진도 등은 지금도 ‘걸쩍지근’(개운 힌지 않은) 한 상태로 남았다. 살아가는 동안 완전히 갚아야 하는 부채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한 완벽주의자의 괴팍
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