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초등생 시절(2편)

by 그루터기

매주 화요일은 용의 검사일이었다. 전교생이

아침전체 마당 조회 시간에 모였다. 손톱 두발

복장상태 등을 점검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거기에 추가하여 세수 여부도 점검했다. 세수

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자수할 좋은 기회를

특별히 준다며 어린이들을 꼬드겼다. 이에 300번지 막내가 자신 있게 자신의 대오를

떠나 앞으로 나섰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어려운 말을 떠올렸는지 막내는 세수를 거른 무리에 자신 있게 합류를 했다. 귀가 후에 여동생은 집안 망신이라고 난리를 쳤다.


공해라는 말이 일상화되기 전이었다. 엄동설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날의 연속이었다. 거북이 등짝처럼 피가 날 정도로 손등이 쩍쩍 갈라진 모습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등교 전 아침마다 따뜻한 물에 냉수를 섞어 세수를 할 정도로 온수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날을 잡아 별도로 따뜻한 물을 충분히 마련했다. 냉수는 전혀 섞지 않는 온전히 뜨거운 물에 양손을 풍덩 담갔다. 구멍이 뻥뻥 뚫린 공깃돌 만한 때밀이 전용 도구가 된 규사토 뭉치로 있는 힘을 다해 손등을 밀어댔다. 겨울철의 월례행사였다. 묵은 때를 총정리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한쪽의 귀뽈을 날카로운 도구로 찔러 얻어낸 적은 양의 피를 투명한 유리 위에 올렸다. 시약 등을 첨가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 판정했다. 혈액형 검사였다. 초등 1학년에 일찍이 경험했다.


5, 6세부터 젖니를 영구치로 갈아치웠다. 혀로 힘껏 밀어내 의외로 쉽게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당 젖니를 바느질용 흰 실로 튼튼하게 묶고선 ‘마빡’(이마)을 불시에 기습적으로 때림과 동시에 손으로 실 끝을 힘껏 잡아당겼다. 아니면 안방 출입문 안쪽에 실 끝을 묶고 바깥에서 불시에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방법도 동원했다. 주인과 영원한 이별을 한 아랫니는 아궁이 안쪽으로 집어넣고 윗니는 초가지붕으로 던지는 것으로 이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반바지와 러닝셔츠 차림을 한 나는 그 지독한 한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해 제법 무겁고 투박한 두레박을 들고 집을 나섰다. 천주교 공회 소 뒤편에 자리한 재래식 공동 우물로 향했다. 내 몸의 노출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우선 두레박 한가득 우물물을 길어 올린 후 혹시 엿보는 행인이 있는가를 사방으로 둘러보았다. 후다닥 옷을 벗음과 동시에 머리 위로 물을 들어부었다. 별로 내세울 것도 볼 것도 없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 되었는지 수건으로 몸뚱이의 물기를 잽싸게 훔쳤다. 반바지부터 얼른 챙겨 입었다. 이른바 나만의 간이 목욕이나 샤워 방법이었다.


큰 마음을 먹고 커다란 가마솥 가득 물을 펄펄 끓였다. 널찍한 고무 대야에 들어 앉았다. 새해 들어 몸의 일부가 된 묵고 찌든 때를 말끔히 떨어냈다. 이 연례행사는 주로 부엌에서 마무리했다. 어머니는 가끔 등을 밀어주었다.


면사무소 소속 20대 초중반의 여직원은 결핵 지도원 가족계획 홍보요원으로 활동했다. 오늘은 학교로 직접 출장을 나왔다. 20대 젊은 여성 특유의 자존심이 어린 내 눈에도 쉽게 읽혔다. ‘남성 노터치’라는 멋진 멘트까지 날렸다. 콜레라, 뇌염, 소아마비 등 백신을 왼쪽 팔 어깻죽지 위 부분에 잠시 따끔할 정도로 접종을 했다. 담임선생님의 종아리 회초리에 비하면 그 통증 정도가 조족지혈이었다. 이 간단한 걸 못 견디어 교실 뒤편 한구석에 자리 잡은 삼각형 모양의 청소 도구 통 안으로 머리카락까지 숨기는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는 방비, 걸레와 잠시 동거를 했다. 투베르쿨린 반응 검사 우두 BCG 접종 이런 용어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큰누나와 초여름 날 비봉산 3분의 1 정도의 능선에 자리한 약수터를 찾았다. 각각 가루, 알약 모양의 ‘뉴수가’와 ‘당원’을 챙겨 어슬렁거리며 올랐다. 단위당 당도가 일반 설탕 대비 대단히 파워풀한 인공 감미료였다. 건강엔 덜 도움이 되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약수에 풀어 배가 볼록

나오도록 퍼마셨다. 그도 모자라 그 아깝고

소중한 약수로간이 샤워까지 했다. 좀 엽기적

이었다.


2학년까지는 성적ㆍ생활 통지표가 별개로, 3학년 이후엔 하나로 통합되었다. 후자엔 ‘내 몸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라는 큰 제목이 붙었다. 그 아래 키(109.5) 몸무게(18) 가슴둘레(54.5) 앉은키(62.5) 세부 항목별 수치를 적어 넣었다. 신체의 균형(대 중 소), 신체 충실 지수(특대 대 중 소 톡소)로 평가를 받았다. 이 두 가지 항목은 지금의 비만도 정도에 해당했다. 괄호 안은 만 6세인 초등 1년생 나의 기록이었다. 이 정도로 열약함에도 두 평가 요소를 모두 ‘중’이라고 했다. 당시와 달리 신체 조건으로 따지자면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정기적인 이벤트였다. 분말주스 봉투와 사이즈가 비슷한 투명한 비닐봉지에 성냥개비 등을 활용하여 채변을 했다. 검사 결과는 투명한 습자지에 흑색 적색 (+) (-) 등으로 표기되었다. 그 정확한 의미는 내 의학 상식 범위를 넘어섰다. 회충은 누구나 의무적으로보유해야 하는 국민 기생충으로

등극한 지 오래였다. 기생이 아닌 어린이

들과 공생 내지 동고동락했다. 재래식

화장실에 갈 때마다 회충 무더기가 허옇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들어왔

다. 회충과 동거하지 않고 홀로 사는

어린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

전자모기향의 알맹이와 사이즈는 비슷하고 두

는 2배 정도였다. 하얀색 네모난 회충 전용 구제약인 ‘산또닌’이 해결사로 등장했다. 당시

선 아주 혁명적인 신약이었다. 빨아서 복용

했는 그 달한 맛으로 배속에 상주하는

어린이의 친들을 꼬드겼다.


인분을 손쉽게 거름으로 사용하는 텃밭에서 수확

한 야채를 날로 섭취하다 보니 기생충이 기세 등등했다. 회충은 물론 요충 촌충 등도 가끔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강가에 사는 친구들은 어린 나이에도 민물고기 회를 즐겨 먹었다. 다른 기생충과 달리 가볍지 않게 취급하는 간ㆍ폐디

스토마도 발견되었다. 나중엔 디스토시드라는 좋은 약이 개발되어 더 이상 무서운 병이 아닌 것으로 바뀌었다.


6학년 1학기 여름 한 날 수업 중 내 뒷자리에 앉은 친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급히 교실 앞 출입문을 나섰다. 화장실로 직행하여 가까스로 응급처치를 했다. 구충제를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 동거하는 회충이 많아졌다. 그 바람에 아래쪽을 통하여 바깥세상 구경을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교통체증. 병목현상으로 부득이 위쪽 출구를 택한 결과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엽기적인 모습이

었다.


먼 훗날 물기가 있는 손으로 전선 콘서트 등을 만지는 지인에게 감전의 위험을 알리자 배속의 회충. 몇 마리 죽겠지요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당시엔 뱃속의 회충을 모두 소탕하려면 콘세트를 자주 만져야 가능했다.


부엉이도 울다 지친 길고 긴 한 겨울밤 저녁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 300번지 안방 윗목에선 커다란 이벤트가 벌어졌다. 구불구불한 호롱대 아래선 겨울 내복은 물론 러닝셔츠를 벗고 안과 바깥을 바꾸어 뒤집었다. 내복의 재봉선 따라 길게 이어지는 골 짜가마다 샅샅이 수색을 했다. 교차로에 해당하는 매듭진 곳은 ‘이’의 집단서식지였다. 유충인 ‘서캐’도 운 좋게 찾아냈다. 양쪽 엄지손톱을 부딪혀 살육이 일어났다. 품을 줄이기 위해 서캐는 호롱 불이나 촛불에 한꺼번에 지져버리는 방법도 등장했다. ‘따 따 따 닥’하는 장쾌한 장송곡이 들리면 소탕작전은 마무리되었다.이면 도로에 줄지어 서있는차량에

대하여 한방에 불법 주차 단속 딱지를 떼는 대박이 일어난 것이었다.


300번지는 면소재지에 해당하여 문명의 이기인

전기의 혜택을 벌써부터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잦은 정전으로 호롱불 남포 불 촛불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이러한 소탕작전은 호롱불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제대로 성과가 나왔다.


과부하가 걸려 자주 정전이 일어났다. 두꺼비집의 휴즈가 절단이 되었다. 제대로 된 규격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철사 동가리로 응급처치를 했으나 정전의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이벤트 기간 중에 장대높이뛰기 세계기록 보유자인 벼룩이 ‘베릉빡’(방벽) 쪽으로 실력 발휘를 하여 달아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한겨울인 관계로 매미채가 지근거리에 있지 않았다. 맨손으로 포획을 시도하나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둡고 습한 곳이나 따뜻한 곳에서 서식했다. 종이, 풀, 탄수화물, 옷감 등 식물성 섬유를 주로 먹는 존재였다. 다름 아닌 ‘좀’이란 놈이 있었다. 옷가지의 손상 방지를 위해 어머니는 하얀색의 알약인 나프탈렌을 조금씩 종이에 나누어 싸선 옷장 이리저리 분산해 넣었다.


머리 밑에 피부사상균이 침입하여 일어나는 피부병이었다. 두부백선으로 부르기도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 기계 총은 한 두 군데 정도 달고 살았다. 300번지 동네 말로는 ‘부승묵’이었다. 머리털이 나 있는 부분에 둥그런 홍반이 생기고 피부가 벗겨지며 그 부분의 머리털이 윤기를 잃고 부스러지는 형태와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모양이 일정하지 않게 피부가 벗겨지며 머리털이 끊어져 검게 변하는 형태가 있었다. 피부과 병원은커녕 일반 의원이나 약국도 찾지 않았다. 그 독성으로 악명이 높은 허연색 분말인 DDT를 해당 부분에 ‘흔쳤다’. 일종의 민간요법이었지만 분명 과잉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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