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초등생 시절(3편)

by 그루터기

어린이 두발은 크게 상고머리와 삭발 중 택일을 했다. 삭발의 경우에도 보통과 2부 등 남기는 머리카락의 길이에 따라 구분이 되었다. 이발 요금은 상고, 삭발 각각 20원, 10원이었다. 어린이는 신장 등 체구가 작기 때문에 이발소 의자의 양쪽 팔걸이 위에 20 × 80 센티미터 정도의 송판을 걸치고 그 위에 앉아 이발사의 처분을 기다렸다. 여자 어린이는 대부분 단발이고 긴 생머리나 땋은 머리도 가끔 구경할 수 있었다. 여자 어린이는 주로 미장원을 이용했다.


손가락을 끼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바리깡’(이발기계)의 날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쥐어 뜯기듯 했다. 따끔따끔한 통증을 호소하지만 ㅅ개선은 잘 되지 않았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어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기다란 가죽끈 서너 개를 모아 벽에 걸고 아래 끄트머리를 잡고 면도날의 양측 면을 교대로 문지르는 방식으로 면도날을 벼렸다.


보통 플라스틱 물컵 대비 높이는 낮고 용량은 너른 ‘면도용 비누거품 제작 전용컵’에 세탁비누를 넣었다. 뭉툭하고 하얀 손잡이가 달린 솔로 여러 번 문질러 면도용 거품을 만들었다. 어른들의 구레나룻 턱수염 코털 부위 등에 허옇게 바르고 면도를 시작했다.


이른바 성수기인 양대 명절 직전 이발 시즌엔 1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수고도 했다. 상고머리 남자 어린이의 이마 부분을 자로 잰 듯이 단정하게 다듬어 모두 어린이는 범생이가 되었다.


300번지는 면 소재지라서 일찍부터 전기 혜택을 누렸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통신수단인 전화를 가구별로 가입하듯이 전력 인프라를 갖추었다. 전기 사용 여부는 한국전력과 개별계약을 맺는 방식이었다. 소재지 이외의 다른 부락은 전신주 변압기 송전소 등 인프라도 나중에 구축되었다. 안방과 사랑방은 투명한 30W 알전구로 감당하였고 부엌도 형편은 다르지 않았다.


정전이 되거나 비상시엔 호롱 양초 남포는 물론 심지어 솔가지도 조명기구로 동원했다. 가끔 영화에 등장하는 너른 접시 형태의 용기에 석유를 담고 심지를 축여 불을 밝히는 정말 운치가 있는 풍경도 볼 수 있었다.

꾸불 구불한 원목을 깎아 만든 나무 받침대 꼭대기 평평한 자리에 호롱불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호롱대를 놓을 여유공간이 없어 가구나 옷장 위에 앉히는 경우가 많았다.


질은 주황색 송진이 집중적으로 흘러내린 부분을 따로 떼어낸 나무 조각을 ‘솔가지’라 했다. 불을 붙여 맨손에 들고 한 밤중에 교회로 가는 길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었다. 밝고 화력이 뛰어났으나 악간 리스키 했다. 성탄 전야나 부흥회 때 주로 대령했다.


양초 불은 비교적 고가의 조명 수단이었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았고 정전 시 호롱불 대용으로 또는 제사 때 경건함의 표시로 잠시 사용했다. 양초농을 손바닥에 떨어뜨려 굳게 만드는 장난을 즐겼다. 처음 따끔따끔한 순간만 넘기면 잘 버틸 수 있었다.


보통 알전구와 달리 길쭉하고 주황으로 착색된 10W 내외 화장실 전용 전구도 등장했다. 절전습관이 몸에 뱄다. 전구보다 나중에 등장한 형광등은 두 개의 방 경계벽의 윗부분을 천장으로부터 최소 공간을 마련하여 하나의 막대 형광등으로 두 개의 방을 동시에 책임졌다. 점등과 소등을 자주 번갈아 하는 것이 오히려 전력 소모가 많았다. 짧은 시간인 경우 형광등은 그저 켜 두기도 했다.

남포(램프) 또는 300번지 용어로 ‘호야’라 부르는 조명기구였다. 석유를 담은 병의 아가리에 심지를 꽂아 불을 켜게 만든 것으로 심지를 조절할 수 있고 공기를 공급하도록 해서 그을음을 줄였다. 조명 효과를 높이고 바람에 불이 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로 만든 등 피를 사방에 끼웠다.

우리 집은 이런 고급형 사양 대신 변형된 간이 남포를 선호했다. 석유저장 장치 없이 심플한 직육면체 상자 안에 호롱불을 배치했다. 비교적 장거리 이동시에 아주 제격이었다.


소규지름(석유)은 보급소로 지정된 곳에서만 구입을 할 수 있었다. 약 1.8리터의 용량을 자랑하는 투명한 유리병에 플라스틱 깔때기의 도움으로 담았다. 인삼이나 담배가 국가 전매사업인 것처럼 석유 판매권을 특정인에게 주는 일종의 독과점이었다.

국방색의 T 자형 후레시(랜턴)는 중간 크기의 건전지 2개를 세로 통 안에 일렬로 장착했다. 반사경과 전구가 위쪽 구부러진 곳에 있었고 플라스틱 통을 나사처럼 돌려 빼고 조립하게 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각의 밤 큰댁에 제사를 모시러 행차 시 주로 동원했다. 위생적이고 내구성도 뛰어나 조명기구 중 진일보한 상품이었다. 호롱불 아래 오랜 시간 책을 보고 나면 코 아래에 마치 수염이 돋은 것처럼 시커먼 그을음을 덤으로 얻기도 했다.


월례고사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르는 시험이었다. 3 , 4학년부터 반별 최고득점자만 시상을 했다. 전체 운동장 조회 시 수여식을 거행했다. 상품은 당연히 없었다. 깔끔한 도화지에 미치지 못하는 질이 많이 뒤처진 종이에 상장을 철판에 철필로 적어 등사했다. 인적사항 해당 월등은 수기로 보충하여 적어 넣었다. 평소 나를 많이 챙겨주는 6척 장신의 거구인 6학년 담임선생님이 뒷짐을 지고 성큼성큼 몇 걸음만에 대오에 섞여있는 나를 몸소 찾아왔다. "크게 대답하고 빨리 뛰어나거라"라고 했다. 아마추어 배구선수를 넘어서는 강 스파이커였다. 월례고사는 방학을 제외하고 연 8~9회 치러졌다.


6개 학년 18 학급 일천여 명의 건아들이 한 장소에 모두 모이는 기회란 소풍, 운동회, 전체 조회, 향우반 체육대회 말고 또 있었다. 정돈된 잔디밭은 기대할 수 없었다. 질 좋은 ‘도대흙’으로 보기 좋게 다져진 정도라면 감지덕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에 훨씬 모자랐다. 불규칙하게 흩어진 잔돌과 흑먼지가 날리는 ‘맨 봉당’(맨바닥)에 돗자리나 개인용 깔판도 물론 더러는 책받침도 없었다. 대오를 지어 전교생이 '야지리' 모여 시험을 치렀다. 바지나 치마는 훍먼지와 친해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이나 백일장 풍경을 방불케 했다.


'철푸더기' 앉거나 엉거주춤하게 엎드려 갈고닦은 실력을 답안지에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받침이 없는 경우엔 시험지에 구멍이 뚫리거나 찢어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내가 단골로 오답을 제출하는 문항이 있었다. 국어시험 시간에 특정한 낱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으라는 대목이었다. 엄청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제대로 답을 할 수 없는 건 마친가지이다.


초등학교 졸업 시 우등상과 별도로 있는 교육감, 육성회장, 면장상 등의 수상자를 결정하기 위해 졸업시험을 치렀다. 당시 최고 통치권자의 처가

인사이가 충북도 교육감으로 재직 중이었다. 우

리 반 6학년 담임선생님은 교육감상을 도지사

상으로 불렀다.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졸업식 예행연습일이 다가왔다. 교내 배구 경기에서 자로 잰듯한 볼 배급 실력으로 이름이 난 선생님이 진행을 했다. 수상자가 단상 전면에 먼저 인사를 하고 좌 우로 방향을 틀어 추가로 고개를 숙이는 동작을 연습하던 중이었다.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나에게 ‘이놈 보아라 술을 마셨나?’라고 꾸짖었다. 실제로 친구들을 대표하여 졸업장을 내가 받게 되었다. ●●● 외 164명이라고 했다. 순간 나는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만 졸업을 하는 건가. 초등학교를 마쳐야 중학생이 될 텐데,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등시절 6년 내내 실시하지는 않았다. 오전 2교시와 3교시 사이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월에서 금요일까지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배정되었다. ‘무용’ ‘행진’‘노래 배우고 부르기’ ‘체조’등 요일마다 테마를 달리 했다.


지금과 달리 남존여비니 남아선호라는 말이 비교적 거부감이 덜하던 시절이었다. 남자 어린이가 무용을 한다는 건 좀 어색했다. 한쪽 발을 교대로 앞으로 내밀어 발 끄트머리를 몇 번 흔드는 안무가 있었다. 너무 세게 위쪽으로 흔드는 바람에 벗겨진 신발이 공중 비행을 했다.


나중에 우리 6학년 담임이 된 6척 장신인 선생님은 운동은 물론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지휘자였다. 오선지 악보가 그려진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 칠판을 조회대 연단에 비스듬히 기대어놓고 노래 지도를 했다. 노래 실력을 타고난 딸 부잣집, 나에겐 선후배가 되는, 자매가 교대로 조회대에 올라 선창 내지 시범을 보이거나 서비스로 단독 공연을 했다. 가사 중 ‘풀냄새 피어나는 잔 디어 누워’가 나오는 노래를 나도 열심히 따라 불렀다.


운동회의 단골 메뉴이기도 한 행진 시간엔 남녀 불문하고 ‘하얀 바지’를 입었다. 한 곳에서 주문 제작한 유니폼이 아니었다. 같은 흰색 계열이라도 농염의 차이가 적지 않았다. 군대의 재식 훈련이 연상되었다. 오와 열을 맞추느라 너무 긴장한 탓인지 팔과 다리를 같이 내미는 풍경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국민체조 시작’으로 시작되는 굵직한 남저음 구령이 녹음된 테이프에 맞추어 목 운동 팔다리 운동 숨쉬기 운동 ‘그만’ 이런 흐름이었다. 맨손 체조의 원조였다. 중간놀이 때문에 오전 일정이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여름철과 달리 겨울철엔 좀 더 어울리지 않는 프로그램이었다.


남녀 어린이 각각 2명씩 모두 4명이 1주일간 식수를 챙기고 청소상태의 점검 담임 선생님의 고만고만한 심부름을 받드는 당번 제도가 있었다. 다른 친구보다 조금 일찍 등교하고 늦게 하교를 했다. 자리 배치대로 4인 1개 조로 운용을 했다. 체육 미술(야외) 자연 시간 등 수업에 필요한 괘도 등을 미리 준비하는, 권한보다는 의무가 많은 봉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 반 당번제도 덕분에 5학년 때 벌어졌던 1반과 3반 간 세기적인 결투인 패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집단 기합에서 벗어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곡리 300번지 초등생 시절(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