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도시 대전,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들(2편)

by 그루터기


어느새 또 겨울방학이 돌아왔다. 누나와 형이 새로이 자리 잡은 대사동 문간 자취방으로 나 혼자 두 번째 대전 나들이를 할 기회가 왔다. 자취방 맞은편에는 영세한 가내수공업 형태로 꾸려가는 자그마한 축구공 공장이 있었다. 거금을 들여 구입한 제법 형식을 갖춘 축구 공을 들고선 우리 형제는 인근 대신중학교 운동장으로 자주 달려갔다. 학교는 비탈진 산 중턱 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짙은 녹색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한 운동장을 벗어난 공은 낭떠러지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그래서 아예 회수를 포기해야 했다. 소중한 보물단지를 잃지 않기 위해선 힘을 조금씩 남겨두고 킥과 패스 연습 등을 부지런히 했다.


방학중 관외로 출타 시에는 학교 측에 반드시 사전신고를 하여야 하는 이른바 ‘위수지역 제도’가 있었다. 나는 이를 지키지 않았음은 물론 중간 소집일도 깜빡 놓쳤다. 괘씸죄에 걸린 사실을 고향으로 복귀 후 에야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교장선생님도 아니고 담임 선생님은 더욱 아닌 사립 중학교 설립자가 딴지를 걸었다. 비록 10대 초반의 단신이었지만 나는 아예 무시하기로 했다.


엄연히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란 게 있고 이는 본인의 권한 밖인데 웃기는 이야기라 치부하고 그저 넘겼다. ‘감히 어리고 조그마한 꼬맹이가 겁도 없이......’이런 멘트가 내 귓전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이러다 보니 나는 당시 중학교에선 호메이니 수준의 전권을 휘두르던 설립자에게 좋은 근평(?)을 받을 리가 없었다.


직장을 다니던 누나는 아침 출근 시간대인 7시 30분 전후에 방송되는 국보급 목소리의 성우가 진행자인 ‘안녕하십니까 김세원입니다’를 애청했다. 외국 혼성듀엣인 카펜터즈의 ‘yesturday once more’의 번안곡을 형과 함께 따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누나가 자리를 빌 경우엔 연탈불이 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으로 보아 형은 학생 겸 생활인이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나는 고교입시에 실패 후 본격적인 대전시대를 열었다.


대전시내 가장 중심지이자 번화가는 단연 목척교 인근이었다. 도청부터 대전역 방향 2/3 수준에 하천을 덮은 복개천이었다. 대전역 쪽을 바라보고 대로 왼쪽은 중앙데파트가 오른쪽엔 홍명상가가 라이벌처럼 자리 잡고 있었었다. 홍명상가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빌 딩위엔 멀리 보이는 ‘브라더미싱’이란 광고탑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대도시마다 점포를 보유한 메이저 백화점 수준엔 미치지 못했다. 백화점에 버금가는 쇼핑몰 역할에는 손색이 없었다. 백화점이란 영어단어를 익히던 시절이었다.


甲의 누나가 꾸려가던 홍명상가 108번 액세서리 코너가 단골 약속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인근 불량 배들의 첫 번째 아지트로 그 이름을 올렸다. 이 코너에서 점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장신에다 긴 생머리를 한 고향 2년 여자 후배를 처음 만났다. 이 후배는 내가 자신의 선배인 줄 이미 알고 있었다. ‘혹시 갑의 누님 되시느냐?’는 내 질문에 그렇게 보이느냐고 반문을 했다.


甲은 나와 고입 전문학원에 3~4 개윌 같은 적을 두었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도 하차를 했다.


우리의 첫 번째 아지트로 甲을 만나러 가던 중이었다. 대중가요 주간 순위 발표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군 복무 중임에도 연속 1위에 랭크 중인 전영록의 "오

늘이 가기 전에 떠나갈 임이여~ 영영 가는

아쉬운 당신이여" 노랫말인 ‘애심’을 인근 전파

사의 네모난 커다란 직사각형 스피커를 통해

즐감했다. 20대 초반 젊은 청년의 맑고 청아한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나와 甲은 5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빌딩의 옥상층인 시식코너의 100원짜리 짜장면은 한참 크는 청소년의 두세 번의 젓가락질로 바닥이 금세 드러났다.


중학시절 이른 새벽이나 밤늦은 시각 봉곡리, 비단강 건너, 송호리까지도 멀리서 경부선 철로 중 영동과 대전 구간을 오가는 열차의 기적소리를 흐릿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향후 이른 시일 내에 기회의 도시 대전을 거쳐 장차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유학을 하여 사람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야 말리라는 제법 큰 포부를 다짐했다.


●●학원 고입 재수 시절과 고등학생 시절 도합 4년간 나는 대전살이를 했다. 그럼에도 대전

에서 고향 친구와 서로 오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방학이나 양대 명절엔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대부분이었다. 고교를 졸업한 후 오히려 대전에서 고향 친구들과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학원 재수생활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원하는 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나는 한 해를 더 공부를 해서라도 이른바 엘리트코스에 입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었다. 다른 학교의 입학에 실패한 甲은 이 정도에서 우리 같이 고등학생이 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름 설득 겸 위로를 했다.


대전소방서 인근의 삼성동 자취방 시절에 나는 전신 전화국에 근무 중이던 甲의 누나 집을 서로 번갈아 오가며 우리는 자주 뭉쳐 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연속된 입시 실패의 사연을 전해 들은 甲의 누나는 고맙게도 혀를 끌끌 차면서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고교 졸업을 몇 달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을 위한 예비고사’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손에 쥐고 甲과 동행하여 乙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사전의 조그마한 정보 덕분에 ‘한양서

김서방 찾기’ 보다는 조금 수월했다. 우리는 대전

고교 바로 아래 막다른 골목에 자리 잡은

녹색 철제 대문 집 앞에 섰다.


장남의 친구 일행을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한 乙의 모친은 이러저러한 친구들 본인은 물론 가족들 안부까지 모두 챙겼다. 乙의 모친이 손수 정성껏 마련한 아끼바리벼 하얀 쌀밥, 무국 등 진수성찬으로 푸짐한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다. ‘한번 주면 정이 없으니 한 주걱 더 받아라’를 실천한 덕분에 금세 배가 남산만큼 솟아올랐다. 고입 재수를 하지 않은 乙은 고교 졸업 후 서울에서 대입 재수를 마치고 본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재수에도 불구하고 만족할만한 성적표를 받지 못한 乙과 대학 진학을 위한 본고사에 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누었다.


이날 회동이 나와 甲, 乙이 삼총사로 징글징글하게 뭉쳐 다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전 인근 다른 일당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고 불량배 백수건달 집단이 탄생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乙은 대학에 입학을 했고 나는 또 한 번의 재수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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