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도시 대전,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들(3편)

by 그루터기


10. 26 사건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아주 큰 전환점이었다. 같은 해 11월 중순 무렵 고향 친구 예닐곱 명이 대전 시내 중고교 두 군데서 조우를 했다.


‘대학 입학을 위한 예비고사’에서 누구는 응시자로 또 다른 친구들은 응원자로 나섰다. 시험 중간 점심시간에 맛있는 밥 한 끼를 같이 하자고 고사장별로 나누어서 역할 분담을 했다. 친구 丙은 ‘야 대현아 넌 금방 알아보겠더라’ 수험생과 부모 친구들이 뒤엉킨 인파 속에서 고교 졸업 후 무작정 길러대어 더벅머리를 자랑하던 재수생인 나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했다.


나의 신대방동 하숙집 시절이었다. 甲은 인근 자동차 정비소에 근무하던 차에 눈퉁이가 밤탱이가 되어 나를 찾았다. 예비 고사 응시를 위해 내게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을 했다. ‘부친, 위독 급래요’라는 거짓 전보 요청을 기꺼이 승낙했다. 이에 이불 보따리를 싸들고 열차로 같이 귀향하여 무사히 이곳 시험장까지 동행하였다.


오후 6시 즈음 시험이 종료되었다. 응시장은 2곳이었다. 순식간에 한자리에 모인 일당은 뒤풀이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에 관해 갑론을박을 했다. 통행금지에서 자유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결국 고향 친구 丁의 고교동기가 살고 있는 옥천의 단층 양옥집으로 이동을 마쳤다. 비상계엄의 발동으로 충북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 중이었다.


만찬장엔 물오징어 국을 반찬 겸 안주로 마련했다. 막걸리는 한말이나 대령했다. 프로 연주자 못지않은 실력 보유자인 丁의 친구는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해 뜨는 집’ ‘크레이지 러브’ 등을 열창하여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카세트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고고춤도 한 판 벌어졌다.


막걸리를 무한정 들이켜대던 나는 술에 취한 척 위장을 했다. 방바닥 한 귀퉁이에 들어 누워 음악 감상 모드에 들어갔다. 린다론슈타트의 ‘Long Long Time’이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이야! 세상에 이렇게 좋은 노래를 저렇게도 잘 부를 수도 있구나’ 하며 감탄을 했다. 양팔과 다리에 솜털들이 물구나무를 서고 닭살처럼 소름이 돋았다. 일단 시험은 마쳤지만 이 고단한 나의 인생 항로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 순간에도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너는 왜 그렇게 인생이 고달프냐’고 어머니는 늘 안타까워했다. ‘네가 장차 잘 풀리더라도 오아시스도 없는 오직 모래만 보이는 사막을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혼자서 걷는 형국일 것’이라고 아버지는 늘 응윈겸 우려를 섞었다. 만찬장 인근에 자리한 공장의 여직원들을 꼬셔보려는 친구들의 시도도 있었다. 그 이후의 경과는 개인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접을 수밖에 없다.


지금과는 달리 개인정보보호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이었다. 개인별 예비고사 취득 점수를 출신학교로 통보하는 외에 응시장 별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게시를 하던 시절이었다. 수험번호와 성명 취득점수 등을 하얀색 전지에 타이핑하여 고사장별로 방을 붙였다. 굵기가 가는 철망으로 덮게를 하고 시건을 하여 그나마 위조나 변조 등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있었다. 내가 시험을 치른 장소를 잊지 않고 찾아 乙은 취득점수의 끝자리는 불분명하다는 단서를 달고 나머지 백, 십 단위를 누나에게 알렸다. 친구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절대 수치만 보자면 현역 시절 대비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살피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다 보니 전형적인 문과 취향인 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과학 과목이 일부 빠지는 대신 전략과목 수준인 사회 과목이 추가되었다. 게다가 전체적인 문제 난이도가 낮아진 점등을 감안하면 결코 만족하거나 여유 있는 성적은 분명히 아니었다.


다음 해 1월 이후였다. 결혼을 코앞에 둔 乙의 누나의 심부름이 떨어졌다. 혼수품 중의 하나인 턱의 둘레 나비가 여유 있게 너른 ‘백금색 스테인리스 재질의 대야’를 보자기에 싸들고 나중엔 내 모교가 된 학교까지 열차, 전철, 버스 등을 골고루 이용하여 나를 따라나섰다. 乙은 비위나 넉살이 나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에이, 창피하게 누나는 대야를 배달하는 심부름까지 시키네 “라고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거절은 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집 정원의 절반을 건너뛰고 예비고사 성적

만으로 선발하는 특차전형의 점수에 나는 좀 모자랐다. 순간 나는 전공을 바꿀까 망설이던 차였다. 乙은 ’ 대현아 무조건 애당초 목표한

전공을 지원해야지 무슨 이야기냐’며 단호하게 역정을 섞은 충고를 했다. 그래서 나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트랙을 밟는 거로 처음 목표한 전공에 지원을 했다. 참 눈물 나게 고마운 乙의 응원이었다.


이 글을 쓸 수 있는 소재가 탄생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70년대 말부터 등장해 거의 10년 정도 우리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나중엔 29만 원이나 되는 통장의 잔고를 자랑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고입 대입 재수를 각각 한 번씩 겪고 다른 고향 친구 대비 2년이나 늦게 가까스로 대학문을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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