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도시 대전,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들 (4편)
3월 초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입학식, 오리엔테이션 등을 제외하고 실제 강의는 3주 내외밖에 받지 못했다. 4월 초부터 ‘총장 사퇴와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학내 이슈 시위에 동참했다. 결국 휴강에 이르고 나는 귀향을 하는 길에 대전에 들르기 시작했다. 십 원짜리 동전을 두 개씩이나 투자하여 자신의 삼촌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丁을 공중전화로 찾기 시작했다.
학내 민주화 시위에 더하여 ‘80년 서울의 봄과 3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메가톤급 사건들로 역사의 소용돌이가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나의 캠퍼스 생활은 이 격동기의 한 복판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교내 이슈 시위와 시국시위로 휴강과 휴교가 뒤를 이었다.
학내 이슈 시위로 인한 학교 단위 휴강과 시국 시위로 인한 전국적인 휴교 등으로 학교 문을 닫는 세월이 점점 늘어났다. 서울과 고향을 수시로 오가던 중 ‘방앗간의 참새’처럼 이곳 대전을 반드시 들렀다. 그리고 적어도 하루 밤 이상 이곳에서 묵게 되었다. 우리는 이윽고 ‘인근 불랑 배와 백수건달’이 되어 시내를 휩쓸고 다녔다. 그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데 정신이 없었다.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의 사실상 발대식을 이미 성황리에 마쳤다.
이때부터 "친구들, 대현이가 대전에 왔는데 시간이 되면 얼굴이나 한번 봄세 ‘가 일상적인 멘트가 되었다. ’ 장난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옷가지나 발행일이 훌쩍 지난 신문지 등을 차곡차곡 쌓아서 운반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한쪽 옆면의 네 변 중 세 변에 걸쳐 지퍼 레일이 부착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제법 부담이 되었다.
메이저 방송국 대전사옥 인근에서 ●●양복점이라는 이름으로 생업에 종사하던 언제나 마음씨 좋은 사촌 매형 가게에 문제의 가방을 맡겼다. 짐이 없이 쏘다니는 데 걸림돌이 날아간 샘이었다. 공중도 날 수 있을 듯했다. 친구 일당들과 대전 시내를 종횡무진 누볐다. 丁의 사무실은 이렇게 해서 일당들의 두 번째 ’ 아지트 내지 소굴‘로 장기간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이후로 나는 서울과 고향을 오르내릴 때마다 대전지역 아지트로 개근을 했다. 오늘은 이른 저녁 식사 시간 즈음에 아지트 인근의 가정식 백반집과 중국집을 반반 정도로 섞은 음식점으로 일당들은 들어섰다. 막걸리가 주메뉴였다. 형편을 생각하여 별도 안주의 주문을 주저했다. 이 사실을 처음부터 눈치챈 안주인은 시골 출신 일당의 입 맛에 딱 맞는 오리지널 토종 우거지 해장 술국을 내어주었다. 지속적인 무한 리필을 받으며 막걸리 빈병은 계속 늘어만 갔다. ‘치부책(계산서)’에 오르지 않는 안주를 거저로 식탁에 올려주었다. 일당은 ‘벼룩 낯짝’을 생각해 비싸지 않은 메뉴의 안주를 결국은 추가했다. 최소한의 염치는 지켰다.
갈마동에 자리한 丙의 문간 자취방에서 서너 명의 일당이 오늘은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작정을 했다. 모자라는 이불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다 덮으려고 이십 대 초반 청년의 강력한 치아로 이불 크트 머리를 사력을 다하여 깨물고 잠을 청했다. 궁금하던 다음날 아침식사 메뉴의 정체가 곧 밝혀졌다. 쭈굴 쭈글 한 주름이 장난이 아닌 커다란 노란 알루미늄 냄비에 콩나물국을 하나 가득 끓였다. 이미 먼저 지어 놓은 밥솥에 한꺼번에 통째로 몽땅 들어부었다. 이른바 그나마 꿀꿀이죽 레벨은 넘어서는 특식이 우리 친구 모두를 위해 마련되었다. 중간중간 상처 투성이인 앉은뱅이 호마이까 다용도 밥상에 올렸다. 각자 숟가락 가득 채워 폭풍 흡입을 했다. 그 산더미 같던 특식을 담은 밥솥은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얼마 후 같은 丙의 자취방에서 나 혼자 또 여름날 하룻밤 신세를 질 기회가 왔다. 나는 조심성이 부족하고 좀 칠칠맞았다. 포리 에스텔이 주된 재질인 별로 가격이 나가지 않는 체크무늬 남방에 음식을 쏟았다. 여벌의 옷은 당연히 없었다. 세탁비누도 준비되지 않았다. 자취방에서 丙의 큰댁에 이르는 길 중간 즈음에 마침 다행히도 바위옷 같은 물때의 빛깔을 자랑하는 재래식 우물을 찾아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주방 세제인 퐁퐁을 들어부었다. 오물 조물 주물럭거린 덕분에 제법 소기의 효과를 거두었다. 천연산 무공해 햇볕에 말리는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십 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의 체온을 뺄래 말리기에 동원했다. ‘자연산 셀프 드라이클리닝’을 작동시킨 것이었다.
지금은 소재 파악이 되지 않지만 체크무늬 남방은 내가 애지중지하던 단벌 상의였다. 본래는 춘추용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한여름엔 전투복 상의처럼 소매를 각지게 팔꿈치 위 부분까지 말아 올려 반팔 셔츠로 변신을 시켰다. 봄과 가을엔 긴 팔 셔츠로 원상복귀가 되었다. 엄동설한엔 안쪽에 내의를 껴입게 되어 사시사철 전천후 상의로 부족함이 없었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모교 후문 인근 이문동 단독 기와집에서 나는 하숙 생활을 이어갔다. 음식과 달리 세탁은 각자의 몫이었다. 매서운 찬바람 덕분에 체감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던 날이었다. 비탈길을 올라 도서관을 가던 중 무릎 아래 부분부터 바지 끝단까지 뻣뻣한 느낌에다 서걱서걱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부리나케 손빨래를 마친 후 미처 채 마르지 않은 바지를 입고 나선 덕분이었다. 체크무늬 남방처럼 내가 평소 아끼는 단벌 바지였다.
초저녁 즈음 친구 丙의 자취방에서 멀리 떨어진 어디선가 탐 존슨의 ‘Take me home country road’가 아주 깔끔하고 달콤한 미성으로 들려왔다. 향후 내 인생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명상에 잠겼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요절한 어느 가수의 ‘젊은 날의 고뇌여’라는 노랫말도 그 당시에 이 구도에 딱 맞았다.
제법 깨끗해진 남방을 다시 차려입고 나름 멋을 부린 나는 익일 아침 丙의 큰댁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이른바 ‘동가숙 서가식’이었다. 스텐 밥그릇 위로 올라온 봉우리가 너무 높아 밥그릇은 이미 가분수였다. 백반을 해결하느라 나는 자그마한 목재 사다리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