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도시 대전,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들(5편)

by 그루터기

훤칠한 키에 근육질로 다져진 덩치에 금테 안경을 썼다. 게다가 체크무늬 콤비를 즐겨 입던 丙을 丁은 마국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홀부르크 차관보가 아니냐고 농을 자주 던졌다.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를 나는 아직도 판별을 하지 못하고 있다.


丙은 구면은 물론 초면인 경우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악수를 나누며 ‘우리 언제 막걸리나 한잔 하십시다’라는 멘트를 입에 달고 다녔다. 어느 모임에서나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었고 남다른 유머 감각이 있어 좌중의 친구들을 항상 즐겁게 해 주었다. 불량배 일당의 번개 모임 시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할 경우 반색을 하며 ‘어이 달구지 선생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라는 물음엔 ‘그거 무어 작은 차(택시)를 굴렸지’하며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기는 등 순발력도 발군이었다.


친구는 평소 막걸리 말고 다른 술은 꺼렸다. 피치 못할 경우 왼손으로 양쪽 콧구멍을 완벽하게 틀어막고선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서 몽땅 떠안은 표정을 지었다. 그 쓰디쓴 소주를 힘겹게 목구멍으로 간신히 넘긴 후에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했다. 친구의 이런 모습은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그림이었다.


남보다 유난히 간지럼에 쥐약인 丙은 일당들이 간지럼 태우는 시늉만을 해도 즉시 반응을 했다. 살아 있는 미꾸라지가 손가락 사이로 삐질삐질 빠져나가듯이 처음엔 ‘배시시’로 시작하여 결국은 뚝이 무너져 봇물 터지듯 요절복통을 하며 달아났다. 고민거리 등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 한 바탕의 간지럼으로 무장해제가 되던 소박한 친구였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머슴아들의 술자리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있었다. ‘만주 벌판에서 개 타고 말장사’ 하던 전설을 친구 丙은 다큐멘터리로 엮어냈다. 다른 누구보다 훨씬 리얼한 버전의 연기를 보탠 것도 것도 모자라 이야기를 단막극이 아닌 시리즈로 엮어내는 타고난 재주도 있었다.


영등포역 로터리 인근 메이저 브랜드 제화점 매장에서 근무하던 송호리가 출생지인 친구를 찾아 신발을 고르던 나를 丙이 다급하게 찾는다는 기별을 접했다. 친구가 고향 지서에서 근무 중인 경찰관을 무슨 이유인지 내동댕이 쳤다는데 혹시 문제가 될지도 몰라 관련 공부를 하고 있는 내 이름을 팔았단다. ‘지서 바로 옆집에 ●●●님의 둘째 아들이 정말 끔찍한 내 절친이다. 허튼짓을 하면 당신들은 제대로 혼날 줄을 알아야 한다는.’등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이며 호통까지 쳤다. 별로 무서울 것이 없던 20대 청년이 벌인 일종의 ‘호연지기’로 보아도 무방하던 시절이었다.


여름의 초입에 들어설 무렵 乙의 집에 모인 건달들은 역적모의를 마쳤다. 두당 이천 원씩 회비를 모아 심천 옥계폭포 계곡으로 ‘회초’ 길에 올랐다. 대전과 영동을 왕복하는 직행버스였지만 행락철에만 이곳을 유원지 입구로 인정하여 한시적으로 정차를 했다.


옥계 폭포 위 쪽 계곡에 자리를 잡은 일당들은 납작한 것, 길쭉한 것, 크고 작은 돌을 동원했다.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임시 야외 화덕을 뚝딱 만들어 냈다. 그 위엔 특급 발암 물질의 부문에서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는, 본래는 가옥의 지붕 용도로 사용되는 기다란 슬레이트 조각을 턱 걸쳤다. 이러니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손색이 없는 정육식당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선호한다는 고기 부위인 삼겹살을 부지런히 슬레이트 판 위에 올렸다. 온전히 익기까지 기다리기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20대 초반의 ‘걸구’들 이기에 불판 위에 삼겹살의 재고가 쌓일 겨를이 없었다. 보다 많이 먹기 위해 이야기도 잠시 중단하는 일당도 등장했다.


비록 슬레이트 조각으로 불판을 갈음하였지만 최소의 안전장치인 포일은 사용했을 거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싶다. 슬레이트 불판의 최대 강점은 당연히 뛰어난 배수 기능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패인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이 흐르듯 기름 등 모든 액체는 조금도 막힘이 없이 쫄쫄 쫄 흘러내렸다. 그 맑은 청정계곡의 물의 농도를 제법 높였다. 사전에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유원지 입구에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가장 지명도가 높은 야외용 불판이었다.

우리 일당 모두는 지금과는 달리 한 살 이리도 더 많게 보여 형님 행세를 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乙은 예비역으로 위장하려고 국방색 군복 하의를 자랑삼아 입고 나섰다. 후식으로 먹고 남은 과일 껍데기 등을 아무 곳에나 거리낌 없이 버리던 일당과는 딴판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차근차근 한 군데 모으던 다른 일당이 있었다. "이 친구야 사는 동안 평생 좋은 말과 일만 해도 세윌이 부족한 것 아닌가?"라 했다. 이는 옛 성현도 미처 생각하지 못할 명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마음속에 새기는 몇 안 되는 좋은 말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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