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도시 대전,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들(6편 완)

by 그루터기


대전 시내를 종횡무진 누비던 일당들이었다. 벌써 통금이 시작되는 자정이 임박했다. 이들은 대전역 인근의 정동 일대 ‘청소년 출입 제한 구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 밀집한 무허가 여인숙 중의 한 곳으로 돌진을 했다.


협소한 선반으로 수용이 모자라 비좁은 방 공간

마저 할애하여 바닥에 깐 신문지 위에 신발을 깍듯이 모셨다. 숙박비를 깎으려고 흥정하던 중이었다. 더블 재킷 양복 정장을 하고 다니던 丙

의 넥타이를 훑둣이 잡아당기며 “넥타이 값 좀 하시지요?”라고 안주인은 핀잔을 주었다. 그 바람에 5,000원을 3,000원으로 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일당 모두가 매우 안타

까워했다.


불량배 행세를 제대로 하려면 하루 해도 모자라 부득이 필요한 외박의 승낙을 받아야 했다. 범생이인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모친에게 전화로 강조하던 친구 乙도 벼락 모임

의 단골 멤버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비교적 화를 참지 못하던 甲을 향해 계속 약을 돋웠다. ‘벌써 코를 실룩샐룩하는 거 보니 오늘도 약발 잘 받는다’ 라면 ‘이 자식들 죽을래?”하며 멋 적어하곤 했다.


우리 고향에선 해마다 조국 광복을 기념하는 8.

15 청년체육대회를 이어가는 자랑스러운 전

통이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과 송호리 솔숲 등지에서 1박 2일간 치열한 경기가 벌어졌다.


대회 기간 동안 긴급한 공지사항을 알리는 수

단으로 활용했다. 초등시절 중간놀이 시간에 악보를 적는 칠판 한 구석에 ’甲 어린이를 찾

습니다. 甲 어린이는 즉시 본부석으로 오기

바랍니다.’라고 백묵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두 사람이 들고선 운동장 둘레를 일주했

다. 독특한 방법으로 甲의 화를 돋우고선 일당

들은 커다란 성취감에 마음껏 웃었다.


늦게서야 길이가 자란 甲은 일당들과 변두리 포장

마차로 들어섰다. '형들을 따라나선 것 같은데 술 실력은 제일이니, 이 무슨 놈의 조화냐?’고 정색을 하고 캐어 묻던 안주인의 모습도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하나였다.


일당들의 번개모임 등 아지트는 충무체육관 맞은편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丁의 삼촌 사무실이었다. 삼촌은 화공 약품 제조 유통업을 꾸려갔다. 오후 어중간한 시간대에 특별히 할 일이 없이 빈둥거리

는 일당들에게 일거리를 제안했다. 지금 시대엔 ‘미션’이란 멋진 말을 대신 쓰고 있다.


장기와 바둑판 등을 들고 복덕방으로 태연하게 잠입을 했다. 각자 편한 자리를 차지하고선 천연

덕스럽게 일종의 영업방해를 개시했다. 우리가 이곳을 들어선 즉시 눈치를 챈 주인장은 우리 일

당을 향해 "너희들, 어디서 좀 놀던 얘들 같은데

이 놈들 보아 "라 하며 비분강개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인장은 두 손을 들었다. 일당은 삼촌의 미회수 채권을 받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수고비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해 결국은 나라에 부역을 한셈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크리스마스이

브를 코 앞에 두고 고향 창고방에서 기거할 때였다. 나를 찾은 丙은 이번 이브날 밤에 대전 모처에서 ●●파티 등 엄청나게 멋진 콘텐츠로 꽉 찬 행사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설득에 나섰다. 내게 가장 말발이 잘 먹힐 것 같은 친구를 골라 일당들이 보낸 게 분명했다.


나는 평소 숫기도 별로 없었고 음주 부문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지만 가무 쪽에선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이후 연말 행사는 아주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유익했는지는 자신들도 몰랐다는 뒤 이야기를 나는 전해 들었다. 누구는 평생 꼽을만한 추억을 만들었다고 자랑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도 그 행사에 참석했다면 인생 항로가 좀 달라졌을까 지금도 궁금해진다.


복싱선수 김태식이 장작을 패듯 휘두르는 펀치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타이틀매치에서 상대를 KO 시켰다. 3회전까지 날린 주먹이 ●●●회나 된다고 혀를 내두르던 일당 중 친구 戊는 최장

이었다. 丁의 삼촌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사무실 전화 다이얼을 남보다 많이 돌린다는 약간의 핀잔을 丁에게 받기도 했다. 그즈음 폭설로 온 천하가 뒤덮였다. 봉곡리에서 죽산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서낭당 부근에서 丁은 ‘우리, 호랑이도 때려잡을 수도 있겠다 ’고 호기를 떨었다.


자가용 승용차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양대 명절 전후로 고향에 내려와 일부 승용차나 화물

차로 여러 군데 부락을 오가던 중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그곳이 송호리 솔숲이든 봉곡리 마을회관 인근이든 아니면 죽산리 산길이든 차를 세우고 자리를 잡으면 그곳이 바로 즉석 술판이 되었다. 이곳에서도 대전 인근의 불량배 일당들은 단골 멤버였다.


대전 도청에서 멀지 않은 대로변의 지하에 당시 시내 최대 규모의 음악 전문 ‘극동 다방’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강가에 사는 친구들은 예외가 없었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송호리가 출생지인 친 두들은 달랐다. 모두가 가수였다. 일당 중 丁은 성악, 대중음악 등 모든 장르를 아주 훌륭하게 소화했다. 성량도 풍부하고 가창력이 뛰어난 아마추어 가수이자 음악 애호가였다. 극동 다방에 丁을 따라 구경에 나선 적도 있는 나는 그 규모와 분위기에 놀랐다. 고막을 찢어대는 음악 소리와 손님의 대화 고함 소리 등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처럼 금연구역이 널리 지정된 것과 달랐다. 엄청나게 많은 ‘오소리를 한꺼번에 잡는’ 담배 연기로 시계가 제로에 가까운 이른바 ‘금연 금지실’ ‘흡연 장려, 강제실’에 다름이 아니었다. 극장이나

버스터미널 티켓 매표소 창구와 모양이 흡사했다.


소규모 아치형 구멍에 ‘리퀘스트’라는 이름

으로 본인이 듣고 싶은 노래 제목을 적은 쪽지를 들이미느라 긴 줄을 서야 했다. 당시 음악다방의 DJ는 젊은이들에겐 선망의 직종이기도 했다.


데보라 헤리의 ‘The tide is high’는 기념비적인 노래였다. 우리도 저렇게 좋은 노래와 가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섞인 즐거운 상상을 했다. 카세트 레코더용 빈 테이프에 본인이 원하는 노래를 녹음해 주는 전파사의 자그마한 수익모델도 등장했다. 나도 丁을 통해서 제법 많은 제작된 테이프를 건네받은 적이 있었다.


대전 인근 불량배와 백수건달들이 떼거지로 종횡

무진 몰려다녔다. 젊음을 수시로 확인하고 온갖 추억을 만들어 냈다. 서로의 끈적끈적한 우정을 다지던 인생의 황금기였다. 이런 20대 초반이 다시 올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은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동녘에 해 뜰 때 어머님 날 나시고 ~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 스무 살 시절에 ~’의 원가수에다 콧소리가 일품이고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장계현의 ‘나의 20년’의 음원을 이번 명절 연휴엔 찾아 한 번 들어보련다. 그래도 2% 부족하면 비록 모자라지만 편한 사람들과 노래방에 들러 나도 보컬로 딱 한 번만 나서나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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