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번째 변곡점(1편)

by 그루터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였다.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나의 대전으로의 전학 가능성을 타진했다. 정부 또는 학교지침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5학년생은 몰라도 6학년생은 대전은 물론 관내를 벗어나는 타 지역으로 전학은 불가하다는 안타까운 응답을 받았다.


당시 군 최고통수권자의 영식 군과 문교부장관 아들이 공부가 시원치 않아 도입하였다는 유비 통신도 있었다. 우리 1년 선배부터 중학교 무시험 전형제도가 전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래서 주소지 소재 신설 학교로 입학 외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엔 삼총사 선생님 이야기 등 재미있고 신나며 역동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자의 반 타의 반도 아닌 반강제로 입학하게 된 중학생활 이면이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추자면 중세의 암흑기에 비견될 정도의 남모를 어려움이 있었다.

초등생 시절엔 나는 선생님의 말은 무조건 받들어 죽는시늉까지도 하던 범생이였다. 이른바 제1의 반항기로도 불렸다. 중학시절은 이에 비해 곤고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거창히 게 말한다면 이념, 가치관, 정체성의 교착과 혼란 등을 겪었고 정신 육체 모든 면에서 피폐해졌다.


어쨌거나 3년이란 세월을 그럭저럭 마무리하고

결실을 거두고자 했다. 그 성공 여부는 결국 원하는 상급학교 진학의 성공 여부에 있었다. 아버지는 초등생 시절에 이어 중학시절 시도하셨던 대전지역으로 전학이 무산된데 내게 보상을 해주고자 했다. 애초 목표로 하였던 학교에 일단 응시를 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엔 고입 재수 전문학원에 보내주겠노라 흔쾌히 약속을 했다. 당시 아버지의 교육열은 어느 학부모보다 절대 뒤지지 않았다.


이윽고 입시철이 다가왔다. 중3 담임선생님은 애초 목표로 했던 학교에 응시할 것이냐고 물어왔다. 아버지가 제시한 보상책의 설명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이에 선생님도 기꺼이 동의했다.

그해 겨울이었다. 실력이 절대 부족함을 자타가 공인하였음에도 나는 보무도 당당히 입학시험을 치렀다.

우리나라 6대 도시 대전의 시내버스는 2종류로 나뉘었다. 지금 대도시 전철 좌석 형태와 배치가 거의 유사한 ‘입석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보다 좌석 수가 약간 적은 ‘좌석 시내버스’로 구분되고 요금은 각각 5원, 10 원이었다. 첫발을 들여놓은 낯선 도시생활에 형이 큰 도움을 주었다.


예비 소집일에 내가 지원한 학교로 들어섰다. 유의사항 전달은 기본이었다. 수험생으로 이곳에 온 정도면 상당한 수준을 넘어서는 학생들로 보아 무방하다며 응시생 칭찬과 자기 학교 자랑을 반반 정도 섞었다. 초등 중학 시절 금속성 소리 벨 대신 확성기를 통하여 나오는 우아한 ‘차임벨 소리 시설’

까지 자랑거리에 올렸다.


예상대로 첫 시험에서 고배를 들었다. 주위 지인들은 후기 고교에 응시할 것을 권유했다. 나는 이를 완곡하게 물리치고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재기전인 고입 재수 길로 뛰어들었다.

내가 응시한 학교에 가장 많은 합격생을 배출한다는 성공 고입 전문학원에 등록을 마치고 와신상담 출정식을 마쳤다.


한 클래스당 약 70 내지 80명을 수용했다. 6개 반이다 보니 제법 큰 규모였다. 처음엔 1반에 편성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동이 있었다. 두 개 반으로 운용되는 특수반인 4반으로 다시 재편성되었다. 학원 내에서 일정 수준 실력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학생들로부터 신망이 매우 두터운 생쥐라는 별칭을 얻은 수학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났다.


정규학교는 아니었지만 제법 지명도가 있는 곳이었다. 기대 수준이 높았다. 이와 달리 일단 교실 등 일체의 시설에 대하여 엄청난 실망을 했다. 교실의 채광 통풍 조명 등 모든 콘텐츠 부문에서 정규학교 수준에 턱없이 부족했다.


보통 정규 학교에선 학생 모두에게 개인 책상과 의자가 배정되었다. 책상엔 교과서 참고서 노트 필통 외 개인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충분한 수납공간이 확보되었다. 이곳 학원은 이와 천양지차였다. 기본 3 명이 한 단위로 책상과 의자를 공유하여야 했다. 책상과 의자는 일체로 되어있어 전후좌우로 정렬할 필요가 있을 땐 두 개 열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교재 등을 올려놓아야 하는 책상의 상판 나비는 A4 용지 세로 길이 정도만 간신히 커버할 수 있었다. 사물함은 언감생심이었다. 책상에 딸린 수납공간은 아예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재와 개인 사물 등은 가방과 책상 상판 사이만을 부지런히 왕복해야 했다.


정규학교와 달리 한 평의 운동장도 없었다. 교실 모두가 같은 건물에 모여 있는 교사동도 없었다. 교실이 이리저리 다른 건물의 1층, 2층이나 때론 쪽방 수준 규모로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4반 교실은 낡은 자재창고를 서둘러 교실로 개조한 것이었다. 바닥은 불규칙적인 요철이 있어 양생 불량의‘쎄이 멘트 콘크리트’를 자랑했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이었다. 천장엔 기껏해야 2개의 환풍기에 가까운 선풍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게으르고 성의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선풍기 날개의 사이즈는 제법 컸으나 그 성능은 작지만 똘똘한 가정용 스탠드형 선풍기에 견줄 수 없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선생님들의 하얀색 Y셔츠와 속옷 상의는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사이좋게 한 몸이 되었다. 알몸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배치고사 20번은 물론 모의고사를 정신없을 정도로 자주 치렀다. 시험 전일 총정리한다는 이유 등으로 무단결석을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친구들을 한 때‘고시파’라 불렀다. 10대 중반의 청소년들인 원생들은 벌써 팝송 등을 자연스럽게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훗날 국내 가수가 번안하여 "아버지, 말씀은 없어도 그 높은 뜻을 어이 잊으리~"로 부른 적도 있다. 경쾌한 선율로 따라 부르기 별로 어렵지 않았던 윈곡 폴랭 카의‘파파’를 모르면 왕따를 당했다. 지금 다시 한번 아버지를 생각하니 번안 가사가 내 폐부를 찔러댄다.


본래 간식을 즐기지 않는 나도 대단한 변신을 했다. 바다산 고동이라는 먹거리에 푹 빠졌다. 민물 고동 길이의 1.5배에다 껍데기 표면엔 탁한 하얀색 점이 이리저리 흩어져 박혀 있었다. 이쑤시개 등 도움이 없이도 보통 사람의 흡입력으로 한방에 손쉽게 섭취가 가능했다. 번데기를 담아 팔듯이 신문용지로 만든 작은 고깔 모양의 일회용 컵에 담았다. 단돈 10원이면 맛을 볼 수 있었다. 대박 아이템이었다. 판매자가 보통 원했던 염도보다 학생들의 손맛이 더해진 덕분에 약간 더 레벨 업된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이미 교실 바닥엔 이 고동 껍데기가 널브러졌다. 10대 중반 청소년들도 낙상을 걱정해야 했다.


등교 후 하교까지 학생들엔 줄곤 이탈하지 말아야 할 이른바‘위수지역’이란 것이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경계를 정하였다. 당시 지명도가 제법 높았던 맥주 브랜드인 ‘이젠 백’ 대리점 건물도 한쪽의 경계가 되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재미있는 일이었다. 모든 재수생의 가장 큰 로망이 지난해와는 달리 이번에는 과목마다 올백점을 받아 본인이 희망하는 학교에 여유 있는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이었다. 이를 어찌 그렇게 잘 알아차린 듯이‘이젠 전과목 올백점’이란 의미가 곧 이젠 백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당시 180센티미터를 넘는 길이를 자랑하는 장신이었다. 대중가수 문정선이 부른 보리밭이라는 노래를 가르쳤다.‘어린 학생들에게 웬 유행가를 가르칠 수 있느냐’며 인근 주민들이 원장실로 항의차 직행했다. 상당수 직업여성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밀집해 있던 이른바 ‘청소년 출입금지구역’이었기에 이런 해프닝도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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