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변곡점(2편)

고입 재수 시대

by 그루터기


고교 입시 200점 만점 중 20점이나 차지하는 체력장이란 것은 만점을 받아야 최종합격에 걸림돌 하나를 미리 제거하는 정도였다. 6월이나 7월부터 집중훈련을 했다. 학원 자체 운동장이 없었기에 철도운동장이란 곳의 신세를 지었다. 점심 식사 후 저녁 전까지 힘든 연습을 이어갔다. 훈련을 마친 후 오병호란 친구가 가끔 가곡, 칸소네, 샹송 등 제법 수준 되는 노래를 다른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먼훗날의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학원동기를 통해서 이 친구는 관악산 음대를 졸업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다.


수업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방법으로 초등시절의 금속성 벨대신 양주동 박사가 가사를 달은‘어머님의은혜’노래를 활용했고 효심을 가르치는 학원이라는 걸을 강조했다.외자 이름을 쓰는 원장을 비롯하여 대전 시내 2내지 3개 메이저 학원장 자리는 같은 집안의 형제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내 몸은 내 몸이면서 내 몸이 아니다’라는 모토를 수시로 낭독했다. 이 문구엔 효도나 애국 등 나름 시대 이데올로기가 녹아 있었다. 중학시절 한 분기의 등록금이 대략 4,500원 내지 5,000원이었다. 처음 이 학원에 입학당시 학원비는 크게 부담이되지 않았다. 나중엔프린트물 등 부교재비라는 명목을 추가하여 월 9,500원을 넘어섰다. 이른바 등록금이 아주 부담스러운 고액 집단 과외학원으로 불러도 무리가 아니었다.


토요일을 제외한 평일엔 항상 2개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보온병은 물론 따뜻한 식수도 없어 도시락 뚜껑에다 어묵 국물을 줄서서 배급받듯이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었다. 이 어묵 국물로 찬밥을 약간 덥혀 먹는 것이 대세였다. 나는 자존심이니 품위 등을 내세우며 오리지널 찬밥 뭉텅이를 꼭꼭 씹어 넘겼다.‘눈물 젖은 빵’보다 먹기가 좀 수월했다.


평일 야간수업을 마친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학원문을 나섰다. 시커면 연탄재로 뒤덮인 비포장 흙길의 대전천 변을 따라 걸었다. 함태 연탄 진입로가 연결되었고 좌회전하여 50내지 60미터를 지나면 보금자리인 선화동 자취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귀가 길의 대전천변을 따라 삼선교(여보다리)를 통과하는 시각은 늦은 9시 35분 전후였다. 당시 모 메이저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을 코미디언 배삼룡이 진행했다.‘세월따라 노래따라’였다. 인근 전파사 앞에 세워둔 검은색직육면체 스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공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나마 지친 영혼에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9월에 실제 시험이 예정된 체력장의 집중연습은 7월부터 돌입했다. 우리가 훈련을 하는 철도 운동장은 독특했다. 낡은 블록담벼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담의 높이는 통일되지 않아 고도 제한 지역에 세운 아파트의 들쑥날쑥한 높이가 연상되었다. 철제 출입문은 따로 없었고 허름한 출입구만 있었다. 철봉, 멀리뛰기용 모래사장 시설과 슬레이트로 건성건성 올린 지붕과 열약한 여나무 줄의 계단이 쉽게 눈에 띄었다. 우천시 온전히 비바람막이 역할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관람석 같은 계단이 어설프게 단상이나 본부석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 종료 후 대오를 맞추어훈련장으로 이동을 했다. 과목 담당선생님 모두를 동원해도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임시 일용직원을 고용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포함하여 총 8 개 종목의 테스트 분야가 있었다. 그중 군사훈련을 연상시키는 수류탄 던지기도 그 이름을 올렸다.


하얀색 횟가루로 그럴듯한 원을 그리지는 못했다. 자세히 살펴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맨흙 위에 대략 그린 동그라미 경계 안에 들어서서 훈련생들은 젖먹은 힘을 다하여 수류탄을 던졌다. 한번에 5명 선수가 원안에서 준비를 했다. 1 인당 10개의 수류탄을 보급받았다. 자신에게 할당된 10개의 수류탄의 투척이 모두 끝나면 운동장에 널브러진 수류탄을 모두 회수해야 했다.


호각을 불어 알리는 개시 신호로 힘껏 뛰쳐나갔다. 이러면 한번에 모두 50개의 수류탄이 회수되는 것이 맞았다. 해당 조교(일용직원)는 5 ~ 10 개 정도의 수량을 훈련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먼저 회수하여 감추었다. 그러니 당연히 부족분이 생겼다. 각자의 몫인 10개를 모두 회수하지 못하는 훈련생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조교는 나중에 악당이라는 별칭을 선물로 받았다. 10개에서 회수량을 제외한 부족분 한개당 2, 3대의 체벌로 종아리를 때렸다. 직경 2 ~3 센티미터의 속이 약간 비어 있고 길이 80센티 내외의 제법 딱딱한 재질의 고무파이프로 종아리를 인정사정없이 갈겼다. 이 무슨 군사정권 시절 논산훈련소도 아니고, 훈련장으로 이동간에 시커멓게 피멍이 든 친구의 종아리가 일행의 눈에 쉽게 들어왔다. 기겁을 한 우리 담임은 혀를 끌끌 찼다. 그 이후 이런 반문명적인 행태의 개선 여부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상의 왼쪽 가슴 위에 학원을 상징하는 로고가 새겨진 짙은 초록의 짧은 팔과 반바지 형태 유니폼이 훈련용 복장이었다. 나는 체력장 훈련을 마치고 보금자리로 저녁식사를 하러가던 중이었다. 장마철의 억수 같은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폐지 캔 플라스틱 용기 등 이른바 재활용품을 자신의 신장과 체격보다도 훨씬 큰 용량의 대나무 바구니에다 기다란 철제 집게로 주어 모아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이었다. 비교적 어린 내 또래보다 약간 위로 보이는 이른바 넝마주이 청소년을 조우했다. "대단하십니다. 저보다 훨씬 용감한 분도 계시네요”라며 한마디 던졌다. 긴팔 상의와 긴바지를 입은 자신의 옷차림 대비 나의 그것이 훨씬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동정심의 발로였다.


대전천 한가운데 듬성 듬성난 이름 모를 풀로 둘러싸인 모래톱 위에 자리했다. 얇은 두께에 10 센티미터 내외의 나비 목재로 엮어 만든 원형의 요리 도구이자 보관 도구였다. 이 도구 외벽엔 ‘꿀꿀이 죽’이란 자조적인 이름도 등장했다. 내가 한겨울 큰집에서 자주 보곤 했던고구마통가리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높이는 그것의 절반 정도였고 전자가 수수깡을 엮어서 만든 반면 후자는 재질이 나무였던 점이 달랐다. 이렇게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절대적 빈곤층이 있던 시절이었다.


고입 재수시대의 출발은 소제동 자취방이었다. 그 보다 어린시절 이미 고향에서 우리와 잘잘 알고 지내던 집안과 같은 울타리안에서 살게 되었다. 기와집 가옥의 대문 왼쪽 문간방에서 형 누나와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아침 피크타임엔 화장실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별로 좋은 품질이 아닌 오래된 송판을 세로로 엮어서 만든 출입문을 달고 있었다.


시골에서 가지고 오는 쌀이나 김치등 부식 보따리가 부담이 되어가끔 택시 신세를 지어야했다. 대동 사거리를 지나 돌로 절구통등을 만드는 석재 작업장을 거쳐 어쩌고 이렇게 기사에게 목적지의 큰 경로를 설명해야 했다.


내가 대전 생활을 시작하기 벌써전 아버지는 누나와 형 자취방에 국산이 아닌 외제 중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선물로 사주었다. 남매의 심심함을 달랠 용도라고 쉽게 말했다. 사실은 뉴스와 정보 교양 오락 등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의 혜안이 있었다. 가로 세로 20 ×12 센티미터의 직육면체 재원이었다. 사이즈나 부피 면에서 라디오와 거의 동일한 네모난 배터리를 질기기로 소문난 노란색 네모 납작한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 일체로사용했다. 오랫동안 우리 형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보물 덩어리였다.


군산에 본부를 둔 서해방송의 수사드라마를 애청했다. 당시 개성이 매우 강한 목소리로 업계를 풍미하던 성우가 수사관으로 출연했다. 나중엔 TV 드라마 형사 콜롬보 주인공의 목소리 더빙에까지 참여했다. 가래 기침 천식 해소 치료제로 지명도가 높았던 용각산 PR에선‘이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당시로선 신선하고 획기적인 홍보 카피까지 훌륭하게 소화했다.


대전 MBC를 통한 영화 광고를 듣고선 누나가 꼼꼼하게 기록하던 가계부 책자 속을 수색했다. 그래서 입장료를 마련한 형은 나와 눈짓 암호를 통해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맹룡과강’‘당산대형’등 이소룡 영화를 섭렵했다. 이는보물덩어리 라디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고교입시에 낙방한 나를 위로하기 위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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