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변곡점(3편)

고입 재수 시대

by 그루터기


나의 고향인 면소재지에서 옥천을 경유, 대전의 인동이나 대흥동 터미널을 왕복하는 시외버스 노선이하루에 두번 있었다. 직행버스가 아니다 보니 손님들이 손을 들면 어디서든 정차했다. 운행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출발 당시부터 많은 비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호탄 다리를 건너 약오백미터 진행 즈음 소낙비는커녕 비포장도로의 먼지가 폴폴 날리는 기상이변도 경험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게 천추의 한이었다. 정해진 시각에 바다가 갈라지는 모세의 기적에 버금가는 일을 어린 나이에 직접 눈으로 지켜보았다.


쌀이나 보리쌀 가마니 또는 김장김치 보따리 등을 감당하기엔 부담스럽고 이동거리가 제법되는 경우엔 택시를, 비교적 가까우면 지게군이나 리어카군의 도움을 받았다. 개회기가 배경인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이야기 같지만 사람 냄새나는 낭만과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누나와 형의 자취방에 합류한지 오래되지 않았다. 같은 울타리 안에서 전세를 살던 집안의 아주머니는 누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아들만 둘이니 잘해먹여 야겠네?”남아선호 사상이 버젓이 살이 있던 시절이었다. 얼마 후 누나는 밥상 위에 물오징어 국을 특식으로 올렸다. 형이 오늘은 네 생일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우리 삼남매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부담 없이 웃었다. 사모님의 5살배기 외손자가 쉽게 따라 부를 정도로 남진의‘님과 함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겨울방학을 고향에서 보낸 삼남매는 쌀, 보리쌀, 너무 많이 익어 시큼한 맛이 더한 김장김치 등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자취방으로 복귀했다. 도착 즉시 가장 먼저 해결해야하는 것은 단칸방의 난방문제였다. 번개탄이 아직 세상에 나오기 이전이었다. 이런 경우엔 정겨운 관행이 있었다. 전혀 사용하지 않은 온전한 연탄 한 장을 주인집에 가져다주고 대신 불씨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총분히 활성화된 연탄을 얻어와 불쏘시개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조그마한 생활의 지혜였다. 그럼에도 방바닥에 온기가 어느정도 퍼지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누나가 중고등학교 시절 수예 등가사 실습 시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방석 위에 더러는 앉거나 서서 하얀 입김을 뿜어가며 가다려야 했다.


초등생시절 약 2~ 3년 동안 같은 반 친구로 다양한 추억을 같이 나누었던 교감 선생님의 아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냈다. 전화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친구 아버지가 근무 중인 초등학교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 극적으로 연결이 되었다. “태준아 네 카드를 받고 기분이 너무 좋아 작은 형과 권투를 했지, 옛날의 내 잘못은 너그러이 용서해주면 좋겠다. 나도 대전에서 고입 재수를 하게 되었으니 빠른 시일 내에 한번 만나자.”는 답신의 카드를 받았다. 이산가족 상봉에 버금갔다.


여러번의 시도 끝에 소제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려극장 앞에서 안경과 흰 장갑을 낀 교복 차림을 한 친구를 극적으로 만났다. 가끔 남자가수로 오인될 정도 멋진 중저음 목청을 자랑했다. 당시 공항시리즈 노래로 공전의 히트를 구가하였던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이 두 친구의 오랜만의 반가운 해후를 축하하는 배경 음악으로 깔렸다. 우리는 소제동 자취방으로 친구를 초대하여 누나가 정성스러운 저녁식사를 마련해 주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길이는 초등 6학년 수준에서 아예 멈춰버렸다고 조그마한 고민을 내게 살짝 고백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교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친구들 사이에선 위세가 대단했었다.


대전 소재 메이저 상고를 다니던 송호리가 출생지인 친구가 나의 소재를 귀신같이 알아냈다. 초등 동기이기는 하나 중학 시절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간 전임 지서장 장남과 같이 소제동 자취방을 찾아왔다. 정말 나는 요령이나 사회성이라곤 낙제수준이었다. 우선 두 친구를 반갑게 최소한 방안으로 안내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어 간식이나 음료수 등이라도 나누는 게 정상적인 수순이었다. 무지하게 반가왔음에도 친구들을 철제 대문 밖에 세워 둔 채로 응대를 마무리했으니 나는 참 무심했다. 지금이라도 두 친구한테 무례하였음에 용서를 구한다.


나는 약 6개월 정도의 소제동 시대를 접고 선화동 시대를 새로이 열었다. 이부자리 찬장 그릇 등 주방용품 옷가지 책가방 신발 우산 앉은뱅이용 책상 등 비록 식구가 3명이지만 세간살이는 골고루 다 갖추었다. 운치있게 화물차가 아닌 마차로 이동했다. 지금은 박물관이나 애버랜드, 민속촌 등에서나 구경이 가능할 달구지도 아닌 마차에 이삿짐을 올렸다.


소제동 시대 형과 가끔 등교 길에 동행했다. 소제동 자취방, 구두병원(신발 수선소), 철도운동장, 굴다리, 학원 도착 대략 이런 코스였다. 비가 오면 굴다리 바닥길은 빗물이 자작자작한 수준으로 질퍽였다. 앞서 가던 초등생들 등에 손으로 들 수도 있고 등에 짊어질 수도 있는 책가방을 처음 발견했다. 참 이런 신선한 발상에 우리 형제는 재미있어 한바탕 또 웃었다.


선화동 시대의 자취방은 낭만 자체였다. 블록담으로 경계를 했다. 한 주택 두 가구였다. 삼남매 자취방의 대문격인 출입문은 당시 그 흔했던 철제대문이 아니었다. 낡은 송판을 세로로 세위 만들었고 재료인 송판의 길이도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높이가 들쑥날쑥하였고 초가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삽짝 문이었다.



삽짝문을 들어서서 뜰팡(뜨락)수준의 높이에서 약 50센티미터 정도 추락하듯이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나비는 좁고 길이는 제법되는 마당이 반겼다. 여기저기 잔디같은 키 작은 잡초가 살겠다고 널브러져 있었다. 비라도 올라치면 청개구리와 크기가 별 차이가 없는 보통 개구리가 뛰어다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큰 누나가 꾸려나가던 시골 가게와 같은 건물의 바로 옆에 자리한 양장점의 부부가 우리 자취방의 주인이었다. 두채의 기와집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 자취방의 건물과 토지의 연면적은 다른 또 한채의 기와집의 그 그사분의 일에 불과했다. 블록담으로 각각 건물의 경계를 구분했다. 담의 중간엔 시골 울타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개구멍’

두배 크기의 아치형 출입 통로가 있었다. 블록담을 쌓은 후에 해머나 망치 등으로 두둘겨 구멍을 낸 것으로 보였다. 성인은 물론 초등생들도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큰 본채 쪽 앞마당에 재래식 우물도 있었지만 식용으론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돗물을 마셔야 했는데 우리의 자취방 건물인 사랑채 쪽엔 수도 시설이 없었다. 본채 쪽 수도꼭지에 약 10미터 내외의 내부의 물흐름이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고무호스를 연결하여 커다란 물통에 받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 농작물의 소독시 농약 분말이나 윈액의 희석용으로 쓰는 짙은 고동색의 입구 부분이 약간 둥글게 말린 모양의 커다란 용기를 사용했다.

본채의 재래식 우물 뚜껑은 나무의 결이 드러나고, 대패질도 건성건성하여 결코 부드러운 재질이 아닌 원통형 덮개였다. 반원 형태로도 접었다 폈다하여 사용했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계속 이어가는 학창 시절 자취 하숙 입주알바 등으로 주민등록 전출입이 잦았다. 때문에 본적지 지서로 신원조회가 온 적도 있었다. 당시엔 이사 후 주민등록지를 이전하기 위해선 전주소지 에선 퇴거신고, 신주소지에선 전입신고를 해야 했다. 그럴때마다 해당 통 반장 모두의 확인을 일일이 받아야 했고 지금처럼 서명과 사인이 아닌 도장 날인이 꼭 필요했다. 이는 매우 번거로웠다. 주민통제수단의 일환으로 보여 흥선대원군 시절의‘오가작통법’이 연상되기도 했다. 한번은 반장이 부재중이라서 통장이 반장 역할까지 대행했다. ‘혼자서 통반장 다 해먹는다’는 행운아도 등장했다. 이러한 번거로움 때문에 나중엔 고향을 붙박이 주소지로 해놓았다.


소제동 시절의 단칸방에서 2 칸짜리 방으로 우리 자취방은 외형상 일단 장족의 발전을 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랑채는 흙장으로 벽겸 담을 쌓았다. 그 후 접착력을 고려하면 백회로 깔끔히 마감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쎄이멘트 콘크리트’로 건성 건성 미장 마무리를 했다. 그 와중에 장차 옷걸이 장소로 사용할 높이의 안쪽벽에 못질이 원활하도록 나름 배려하여 폭좁은 갈다란 나무 판때기를 묻어 놓았다. 이런 배려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사이즈가 다른 스무여 나무 개 못이 높이를 달리하여 포탄의 파편처럼 여기저기 흘어져서 박혀 있었다.


식구 수가 아주 많은 대가족이 살았거나 시설은 부족하지만 민박집으로 활용되지 않았나 하는 상상도 어렵지 않았다. 이 건물도 ‘흙장’을 쌓아 벽을 완성한 것으로 보였다. 소여물 모양으로 듬성듬성 썰은 볏짚을 진흙과 같이 이겼다. 메주

를 만들 때 사용하는‘직사각형 메주틀’ 크기1.5

배의 도구에 이 볏짚을 충분히 채워 넣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 흙장을 만드는 공정을 나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충분한 경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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