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번지 이야기(3편)

by 그루터기

초등 5학년 늦여름이었다. 모교 운동장 조회대에서 1시 방향 측백나무 울타리로부터 2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높이가 다른 철봉 대여섯 개가 나란히 줄져있었다. 바로 앞쪽 하단엔 멀리뛰기나 씨름경기 때 활용하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측백나무 울타리와 철봉 사이에 자리했다. 유구한 모교의 역사를 웅변하듯 매우 오랜 연식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 몇 그루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가지는 사방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철봉선을 훨씬 넘어오기도 했다.

철봉 위에 올라서선 나의 점프력을 발휘했다. 늘어진 가지를 잡고 매달려 독특한 방식 그네놀이로 ‘호수움’을 누리곤 했다. 타잔

흉내를 낸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컨디

션이 최선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점프를 너무 약하게 했는지 기민성의 부족 탓이는지는 몰

랐다. 아뿔싸 가지 끝을 잡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그 직후 유도 낙법을 치듯이 양촉 팔

을 사용하지 않고 굴렀으면 다행일 터였다

.그런데 그러지도 못한 채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왼쪽 어깨뼈가 탈구되었다. 축 늘어진

한쪽 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 움직이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는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사고를 쳤다. 팔뚝이 퉁퉁 부어오고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러한 응

급상황에서 정형외과, 한의원, 접골원 등 어

느 하나라도 있을 리 없었다. 가곡리 1구의 교회에서 3구 교회로 옮겨간 목사님이 이런 탈

골 치료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농촌에서 생

활고 등으로 비관하여 음독자살을 시도하는 경

우가 있었다. 개인용 승용차나 화물차가 없던 당시에 이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유일한 탈것

은 기껏해야 리어카가 전부였다. 이른바 고향 브랜드 개인 구급차에 다름이 아니었다.


좀 민망하기는 했다. 나이 어린 나도 이 구급차

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차례 팔을 이리저리 밀당(?)을 한 끝에 겨우 윈상 회복이 되었다. 목사님이 내 팔을 전후좌후 이리저리 마음대로 조작하는 동안 그 고통은 말할 수 없

었다. 좋은 말로는 참을성‘ 인내 등이지만 보통

은 ’ 미련 곰탱이‘라는 말에 더 가까웠다. 나는

비록 초등생이지만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도 견디기가 만만치 않은데 이놈 봐라 울지도 않네’라고 하며 목사님의 칭찬을 덤으

로 받았다. 붕대 하나로 이리저리 동여매는 약

식 깁스를 했다. 이주일 정도 문제의 팔을 목에 걸고 다니는 걸로 모든 치료는 마무리되었다.

의사 면허 못지않게 경험과 임상도 매우 중

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정형외과 전문의

등 1인 3역을 거뜬히 해낸 목사님이었다.


본채의 안방 전면에 나비 1 × 길이 5미터의 기다랗고 오래된 연식을 자랑하듯 옅은 검은

색 때가 묻은 목재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여

름날 점심식사 등 장소로 때론 낮잠을 자거나

쉬는 곳으로로 아주 긴요했다.


직사각형 밑변 중간엔 둥근 기둥으로 서까래의 하중을 지탱했다. 기둥 중간 내 눈높이 정도엔 나

비 길이 각각 5 × 12 센티미터 사각형의 얇은 철판이 붙어 있었다. ‘재건합시다’라는 팻말이 떨어지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굳게 지켰다. 시

대와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초여름 오후 300번지에 혼자 남겨진 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툇마루 바닥에 서서 이 둥근기둥을 잡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수 없이

돌곤 했다.


둥근기둥 가장 윗부분 처마 밑엔 반원형의 아담

한 제비 둥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푸라기 나무 꼬챙이 등을 물어오고 거기에 고운 흙등으로 둘

레를 쌓아 만든 보금자리였다. 어미 제비가 먹이

를 물어다 새끼들 입에 넣어 줄 땐 서로 먼저 더 많이 받으려고 지지배배 소리를 내며 다투는 모습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았다. 어미닭 품 인근에서 삐약거리는 병아리들 모습에 다름이 아니었다.


사람 세상에서 생계를 책임진 부모가 슬하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노력하는 모습과 별

로 다를 것이 조금도 없었다.


얼굴이 훤히 비칠 정도로 깨끗하게 닦인 중간

기 스텐 양푼에다 어머니는 ‘악수 표 밀가

루’ 반죽을 했다. 고소한 맛을 더하기 위해 노

란색 콩가루도 듬성듬성 '흔쳤다.' 간을 맞추기

위해 약간의 소금도 필요했다. 요리에 적확한 점도를 확보하기 위해 힘을 주어 제법 긴 시간 콩가루가 섞인 가루 덩어리를 치댔다. 나비와 길이가 각 30 × 80 센티미터 되는 송판 위에 덩어리를 올린 후 홍두깨로 조심조심 밀어내서 일정한 두께로 아주 작은 사이즈의 원형 멍석 크기를 만들어 냈다. 중간중간 밀가루를 ‘흔

치기’도 했다 중간에 두께가 너무 얇아져 구멍

이 생기면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했다.


목표한 수준으로 둥글고 일정한 두께의 작품이 완성되면 일정한 나비로 접으면서 차곡차곡 말

아 나갔다. 오른손엔 주방용 칼을 들고 왼손의 손가락 끝을 한데 세워 모아 장차 탄생할 면의 굵기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또각또각 재단하

듯 했다. 고르게 썰은 생국수 가닥은 꽃무늬가

있고 그 너비가 넉넉한 둥근 모양의 쟁반에 보기 좋게 진열을 했다.


가장 왼쪽과 오른쪽 부분은 칼국수 후보에서 제외했다. 중간 부분과 규격이 다르기 때문이

었다. 뿌리만을 가까스로 잘라낸 배추 김장김

치 포기 아래 부분이 남는 경우 그 용처가 애매

한 경우와 유사했다. 후보에서 제외되는 부분

을 ‘국수 꼬량지’라 일찍이 우리 가족은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어머니가 칼국수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 형제들은 작업 반경 안을 절대 벗

어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줄곧 지켜보며 어머니에게 꼬랑지를 본인에게 우선 배정해달

라고 다투어 졸랐다. 어머니는 경계근무를 충

실히 수행한 형제들의 우애를 염려해서 공평

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멸치를 우려낸

국물을 육수로 하여 국수를 삶아냈다. 들기름

을 넣고 들들들 볶은 호박을 잘게 썰어 칼국수 그릇마다 올렸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표 칼국

수가 탄생했다. 나는 이 칼국수는 뜨거워서 식사시간이 길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썩 즐기지 않았다. 대신 ‘건진국수’라 부르는 ‘잔치국수’는 아주 좋아하는 메뉴였다.


잔치국수는 그 재료를 5일 장터에서 사거나

니면 국숫집을 들러 뽑아서 조달했다. 칼국수

보다 면발이 가늘었다. 멸치로 육수를 내는 건 칼국수와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물에 삶아서 찬물에 담가 식힌 후 건져낸 후 볶은 호박, 윈

산지 300번지인 재료로 만든 계란지단, 고

꾸미, 물기를 뺀 쫑쫑 썰은 김치 등을 넣어야 완성되었다. 나는 2 내지 3인분은 거뜬히 치

울 수 있었다. 300번지 형제들은 편의상 칼

국수는 뜨거운 국, 잔치국수는 차가운 국으

로 구분하여 불렀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하사품을 들고 형제들은 정지(부엌)로 돌진을 했다. 국수 꼬

랑지를 아직 불씨와 화력이 약간 남아 있는 아

궁이 속 왕겨재 더미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그러면 국수 꼬랑지는 배가 적당히 불러오다 멈추기도 하고 열기를 참 못하여 터져버리기도 했다. 시커멓게 타거나 그을리다 멈추는 등 가지각색이었다. 형제들은 본 메뉴를 구경하기 전에 이 물건을 애피타이저로 열심히 뜯고 씹어 정신없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무런 양념이나 소스도 없는 그 ‘국수 꼬랑지 구이’는 지금은 물

론 당시도 결코 아주 빼어난 맛이 있는 것도 아

니었다. 300번지 형제들은 쟁탈전을 벌일 만큼 집착을 했다. 다른 고향 친구들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인천의 차이나 타운에서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공갈빵‘과 아주 유사했다.


이제 막 닭 둥지에서 꺼냈으니 온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이런 싱싱한 계란을 세로로 세워 윗부분

을 살짝 깨뜨려 껍데기를 걷어냈다. 안쪽의 내

물을 통째로 흡입한 빈 계란 껍데기 통은 아무 생

각 없이 즉시 버려서는 안 되는 아주 아까운 긴요

한 재활용품이었다. 남은 부분의 상단 부분 4분

지 1 정도의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기름

이 잘잘 흐르는 하얀색 생쌀을 먼저 담고 우물물

을 찰랑거릴 정도로 채웠다. 그런 다음 국수 꼬랑

지를 굽는 것과 동일한 공정을 거쳤다. 약간 뚝딱

뚝딱한 쌀밥이지만 김치를 곁들이면 고소하고 영

양 만점의 틈새 식품인 이름하여 ‘야생 계란밥’이 탄생했다.


300번지 툇마루의 기억을 불러낼 때마다 신경

림 시인의 작품이며 나의 애송시가 머리에 떠

랐다. 그중 한구절인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라는 절창을 다시 한번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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