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 면민 여러분! 어제도 오늘도 생업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오늘 저녁 여러분을 모실 영화,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맨발의 청춘’을 가지고 여러분을 모시겠사오니 문단속 불단속 잘 하시와 레코드 소리에 발맞추어 가족 동반 이웃 동반하시어 왕림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일찍이 연예계(?)에 입문한 5년 선배가 또 마이크를 잡았다. 가설극장 시즌이 도래했다. 5일 장터에 그 위용을 자랑하는 농협 창고 앞면을 한 변으로 하고 윤약국과 5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로로 다른 한 변을 한 직사각형의 상영장을 두껍고 질긴 회색빛 포장 천으로 둘러매어 진용을 갖추었다.
상영장 꼭짓점마다 풀을 베는 낫 등으로 껍데기를 벗겨낸 흔적이 아직 충분히 남아 있는 3~4미터 내외의 말목으로 기둥을 세우는데 한쪽 말목 상단에는 군청색 확성기를 칭칭 동여맸다. 말목 길이가 모자랄 경우엔 하나 더 추가로 덧대어 힘들게 칭칭 감아 매어 목표한 높이까지 올렸다. 약국 맞은편과 창고 건물의 우측 양쪽 끄트머리가 만나는 꼭짓점 인근에 상영장의 입구를 마련했다.
성인 30원, 미성년 20원이라는 요금표가 눈에 들어오는데 더러는 균일 30원으로 게시되기도 했다. 나는 "균일"이라는 용어의 뜻을 이해하기엔 그로부터 무려 몇 년이 필요했다. 성년 미성년의 구분 없이 모두 입장료가 동일하다는 그 깊은 뜻이 있는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면내 권력기관인 지서는 물론 관공서인 면사무소 직원에겐 초대권을 배포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 또한 '적폐'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미성년자 입장 불가인 영화가 상영되는 날이면 양복 정장을 하는 평소와 달리 활동이 편한 점퍼 차림인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생활 지도 선생님들이 총출동하여 교외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이슬 맞은 백일홍’ ‘꼬마신랑’ ‘남이장군’ ‘사랑손님과 어머니’ 등도 이 가설극장을 이미 거쳐 갔다. 300번지 시대 초기엔 흑백영화가 주류이나 나중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으로 버전이 업되었다. 대도시 일급 개봉관이 아니다 보니 커다란 스크린은 항상 장마철이 되었다. 화면엔 수직으로 때론 빗금으로 굵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면민들의 중간 휴식 시간을 넉넉히 보장해 주려는 눈물겨운 배려로 불시에 전원이 꺼지기도 했다
액션 영화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 중간중간 이른바 아군, 우리 편, 좋은 나라 쪽 주연 배우 등이 극적으로 구출되거나 상대방을 무찌르거나 섬멸할 장면에서 모두가 엄청난 애국 면민들은 열외 한 명 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역시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인가요? 내가 중학교 시절 미국의 ‘뽀드득’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어이, 미국은 좋은 나라이고 우리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아닌 겨?" 친구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이를 들은 후 잠깐이나마 정색을 하고 좀 다른 걸 더 생각해야 할 의무감도 느꼈다. 일종의 '페이소스'가 되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 여배우가 당대를 풍미했고 허장강, 박노식, 남궁원, 장동휘, 신성일 등 쟁쟁한 남우들이 맹활약을 했다. 스크린 사이즈 조정에 실패한 탓인지 화면엔 실제 인물보다 세로로 늘어나게 되어 당시 배우들은 모두 훌쭉이 내지 찔죽이가 되었다. 70년대 초반엔 관내 8경 중 첫째로 꼽는 강선대에서 신영일, 윤정희 주연의 ‘무녀도’를 찍었다. 내 고향은 그만큼 풍광이 뛰어났다.
숲머리가 출생지인 우리 형 친구 둘이서 저녁밥은 먹었는지 일찍이 나서서 우리 집 사립문 밖에서 자신이 넘치는 큰 목소리로 형을 불러댔다. 아버지, 어머니, 나를 비롯한 전 가족은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이미 눈치를 채고 남았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형은 친구들을 핑계로 ‘활동사진’을 보게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학교 선생님, 면사무소, 지서에 근무하는 안정적인 봉급생활자가 아닌 아버지를 모시는 우리 집은 현금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이런 문화생활에 선뜻 허락을 해주는 부모가 결코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고 싶으면 계란이라도 팔아 가거라."며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나는 이 대열의 ‘주전자 멤버’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다.
누나 둘을 제치고 스타팅멤버로 형이 번번이 나서게 되는데 이 또한 '장남 프리미엄'이었다. 관람료의 단골 재원이 되는 계란 사정도 여의치 않은 경우도 그렇게 아주 낙담만 하기엔 일렀다.
'궁즉통'이라는 말도 있고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다던가, 이른바 극약처방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오폿대(사이렌대)’ 철제 계단 중간 정도에 그럴듯한 지정 로얄석이 '꽁'(무료)으로 주인을 애타게 기다렸다. 이곳은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모르는 형의 지정석이 되었다. 가설극장 시즌 내내 거저 이용할 수 있는 초대권이 등기 속달로 300번지에 사는 형을 수취인으로 하여 어김없이 배달되었다. 이 지정 로얄석은 한여름엔 시원하여 쾌적하기까지 했다.
당당히 관람료를 지불하고 정상적으로 입장한 손님들도 개인 의자는 물론 서너 명이 같이 앉을 수 있는 허름한 나무 벤치의 제공을 바라지 않아 ‘맨 봉당’에 그저 철푸덕 앉아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공중목욕탕 안의 필수 품목인, 가운데 부분이 구멍이 난 둥근 모양 초록색 의자가 어울릴 듯했지만 가설극장 시대엔 아직 언감생심이었다. 사람의 머리는 결코 장식품이 아니라고들 한다. 아이스께끼나 하드를 먹고 나면 납작하고 기다란 나무 자 형태의 물건을 얻게 되는데 이걸 아래위로 엮으면 제법 훌륭한 야외용 방석이 되었다. 가설극장 시즌에 긴요하게 쓸 요량으로 집 안 윗목 한쪽에다 고이 모셔 두었다. 때론 나무 재질이 아닌 비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라면, 과자봉지 등을 사용하면 좀 더 우아한 작품이 탄생했다.
정상적인 유료 관람객이 되지 못하고 무료 지정 로얄석이나 단체석의 혜택도 받지 못하지만 일부 혈기 왕성하고 문화 욕구가 남다르게 강한 면민들은 이른바 ‘째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했다. 제일 앞선 주동자가 학용품용 칼등으로 포장을 순식간에 찢어버리면 나머지 추종자들은 주최 측이 일당들을 구분하여 색출하지 못할 정도로 잡초 대형으로 흩어졌다. 기존 관람객 사이사이에 끼어 태연하게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각자 자리를 잡아 감상에 열중했다. 때론 주동자와 일부 일당이 생포되는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도 생겼다. 더러는 포장 아랫부분을 번쩍 들어 올린 후 관람객 무리에 합류하는 온건파도 있었다. 영화 종영 약 10~20분 전에 주최 측에선 미리 포장을 걷어내는 등 마무리를 준비하는 덕분에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문화생활 혜택을 대가 없이 누렸다. 비자발적 팬 서비스였다.
어느 시대나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선구자나 선두그룹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을 거창하게 선각자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인심이 후한 선량한 시민들도 있다. 좀 세속적인 말로는 조숙했다고 이르기도 했다.
관내도 사람 사는 동네이니 그런 면민 그룹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사춘기를 미리 가불하는 이른바 선배 그룹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편의상 ‘센 그룹’인 이 선배 남정네들에겐 이 가설극장 시즌은 그야말로 잔치이자 대목이었고 자신들은 물을 만난 고기가 되었다.
이 센 그룹 멤버들은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영화감상이라는 본디 목적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한 건’의 성과를 올려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꼭 앵두나무 우물가 출신이 아니라도 불특정 다수 관내 방년 언저리 처자들을 향해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가설극장 인근을 어슬렁거리며 모든 촉을 동원하여 이미 관련 첩보 수집을 완료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칭 프러포즈를 해댔다.
가설극장 시즌이 아닌, ‘집중 연애 이벤트 시즌’이라고 해야 했다. 아랫입술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빌어 앞쪽으로 ‘쭈우욱’ 잡아당겨 아주 큰 용량의 휘파람을 수시로 불어 댔다. 처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건 기본이고 처자들을 추적하느라 모두가 달음박질 선수가 되었다. 음료수, 과자 등 먹거리로 물량공세도 펼쳤다. 이 센 그룹 선배들이 모두 소기의 목적 달성을 하였는가에 관한 통계자료를 나는 그 이후로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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