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나 바둑 경기에서 본인이 직접 선수로 나서기보다 옆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훈수를 하거나 해설을 하게 될 경우가 그랬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 이상을 발휘하게 된다고들 했다. ‘선수 3급 훈수 5단’ 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가무 부문에선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직업ㆍ아마튜어 가수 노래를 듣고 나름 평가하는 역량은 최소한 바닥은 아니라고 자부했다.
최상급 레벨의 가수를 보건대 애초 가요 부문부터 입문한 부류에 비해 국악이 그 바탕이 된 쪽이 가창력 등 펀더멘탈에서 훨씬 앞서는 것이라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었다. 탤런트나 영화배우도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 출신이 더 내공이 있어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친구 명주 바로 아래 동생 현미는 국악 쪽에 선천적인 재능과 대단한 역량이 있는 건 누구나 인정했다. 역시 기본기가 탄탄했고 칠갑산을 원 가수보다 뛰어나게 부르는 실력을 뽐냈다. 중간중간 장고와 소고도 두들겼다. 엄청난 실력 중 맛보기 수준만 살짝 공개했다. 본 잔치에 흥을 돋웠다.
내 막내 동생과 학교 동기인 혜수는 가요를 비롯하여 가곡 팝송 모든 분야를 넘나드는 이른바 크로스오버 뮤지션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러다 보니 무대는 퓨전음악 공연장으로 잠시 탈바꿈했다. 현미는 모든 노래에 뛰어나게 화음을 넣는 건 기본이고 율동에도 능하여 댄서 가수로도 손색이 없었다. 안무 지도자를 겸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일행은 무대와 식탁 사이를 부지런히 교대로 오갔다. 내가 트렁크를 털어 준비한 3가지 종류의 술은 물론 진열장에서 진정한 임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모든 종류의 술이란 건 죄다 총출동했다. 술잔 바닥이 뚫렸거나 아니면 술 마시기 A매치 경기라도 벌인 듯이 수시로 부어라 마셔라를 이어갔다.
후배 현미와 혜수는 국내 굴지의 일류 호텔 주방장의 음식 솜씨를 이미 넘어섰다. 제일 먼저 선보인 야채 계란말이 야채 과일 샐러드를 비롯하여 두부김치 골뱅이 무침 대구포 등 마른안주 모둠도 등장했다. 노래만큼이나 음식 래퍼터리도 다양했다. 양주 맥주 소주 등과 서로 궁합이 맞는 안주를 때늦지 않게 미리 완성하여 식탁에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행 모두는 오늘이 이번 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망가지기로 작정했다. 이윽고 시각은 자정을 훌쩍 넘기고 새벽을 향해 달아났다. 나는 순간 300번지 안방 위쪽 출입문 외벽 상단 한 구석에 자리했던 사기 재질의 두꺼비집이 걱정되었다. 이곳 안에 숨어 있던 퓨즈가 끊기어 정전이 된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영사기처럼 부지런히 돌아가던 일상생활이 찍힌 필름이 끊긴 것으로 보였다.
VVIP 고객 접대 차 내 사무실 인근 주점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을 했다. 너무 늦은 시각까지 이렇게 이벤트를 이어가면 곤란한데, 순간 빠른 귀가를 위해 택시나 대리운전을 찾았다. 먼저 집사람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하며 허둥지둥했다. 이거 보통 사달이 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를 벌써 눈치챈 동기 명주는 내게 여긴 일반주점이 아니라는 등 현 국면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나는 결국 문턱이 제법 높은 황토 방 한 곳을 정해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찾아 나섰다. 이곳을 독차지하는 특혜를 받고 꿈나라 여정에 올랐다.
아무리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직업 특성과 습관 때문에 근무일이 아닌 주말에도 잠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시각은 일정했다. 드디어 길지 않은 꿈나라 여행을 마감한 후 어젯밤 광란의 파티가 벌어졌던 연회장에 들어섰다.
식탁 위는 물론 플로어 여기저기엔 각종 빈 술병이 나뒹굴었다. 음식물 잔해도 잡초 대형으로 흩어져 있었다. 폭격을 당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다른 일행들은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하얀 밤을 보냈던 것이었다. 이 연회의 참가자들 모두는 자랑스럽고 훌륭한 조국의 아들 딸에 손색이 없었다.
나는 최근 회사에서 시행된 ‘희망퇴직’이란 이름의 커다란 허들을 간신히 넘고 살아남았다. 이를 기념한다는 이름을 붙여 오늘 아침 해장국은 내가 쏘기로 했다.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빈번하게 들르는 ‘고딩이국’이 간판 메뉴인 단골집으로 향했다. 역사적인 광란을 밤을 지낸 기념으로 ‘보통’이 아닌 ‘특’으로 한번 더 기분을 냈다.
양주 맥주 소주 막걸리 인삼주 과일주 와인 등 술이란 이름을 단 액체가 담긴 병이나 용기는 모두 바닥을 드러냈다. 옛 유치원 진열장의 모든 알코올의 잔고는 제로가 되어 일대를 청정지역으로 만드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달성했다.
이런 거사를 동기 모친상 한가운데 벌였으니 송구스럽긴 했다. 우리 일행은 고향 친구 동기의 자매와 선후배가 되다 보니 편한 지리였다. 그 누구의 조그만 방해도 전혀 받지 않았다. 마음껏 소리 지르고 노래방 기기 등 모든 최첨단 음악 설비의 신세도 졌다. 음주 박람회장을 방불케 하는 넉넉한 배경이었다. 화려한 무대에서 벌어진 이번 역대급 빅 이벤트는 내가 이 생을 다하기 전에 리바이벌은 쉽지 않을 듯했다.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즐겁고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