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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Aug 26. 2022

내가 ‘퉁’ 했잖아

격의 없는고향 친구

“야! 아니, 내가 퉁 했잖아! 너 깡패야? 왜 화투패를 또 치는 건데? 너, 내가 혼자 귀촌했다고 깔보는 거야 뭐야?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아니, 나는 이렇게 화투를 다시 한번 더 치면 네가 다시 퉁 하지 않고 이번엔 뗄 줄 알았지?”

순미는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했다.      


고향 친구 절친의 아들 혼례식에 참석한 이후였다. 우리는 장태산 휴양림 인근 ‘황토펜션’에 모였다. 뒤풀이 행사에 열댓 명의 친구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8월 두 번째 주말 오후였다. 조선 토종 통돼지 바비큐를 안주로 이미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친구들이었다. 평소 정해진 매뉴얼대로 두 팀으로 나누어 고스톱판을 벌였다. 고향 친구 모임에서 나는 이제 세 번째 총무를 맡고 있었다. 내 고스톱 전용 가방 안에 항상 대기 중인 장비를 친구들 앞에 이미 풀어놓았다. 국방색 A급 군용 모포 두 장과 화투 두 목이었다. 본디 한 장이었던 모포를 두 장으로 정확히 이등분했다. 그러다 보니 모포의 사각 테두리 부분의 실이 더러 풀리는 등 깔끔하지 않은 외모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수도권 나들이 길에 단골 세탁소에 들러 ‘오바로꾸’ 작업을 완료했다. 조기 축구 회원들이 주로 둘러메고 다니는 검은색 가방에 이 모포를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고스톱 전용 가방은 이래서 ‘오바로꾸’라는 별칭을 얻었다. 동창회 총무 3선 경력이니 친구들을 위해 이 ‘오바로꾸’ 정도는 마련해야 하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팀 선수는 모두 4명이었다. 순미, 경주, 애진, 나 이랬다. 4명이 용호상박을 방불케 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이어갔다. 선수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에 매진했다. 나도 이제 고스톱 구력이 자그마치 40년을 넘어섰으니 절대 초보자는 아니었다.


코로나19 감염증 출현 이전엔 건너뛴 적이 없었다. 우리 고향 동기들의 1박 2일 공식 정기모임은 1년에 두 번이었다. 이에 우리 동기들 자녀 혼례식 뒤풀이로 가끔 특별 모임도 이어갔다. 오늘도 이것으로 정기모임을 갈음하듯 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는 준칙은 이곳에도 그대로 통했다. 시골 친구들 모임에서 벌이는 고스톱 경기의 룰은 매우 독특했다. 거의 ‘민화투’에 가까웠다. 그저 밋밋하고 변동성이 작아 반전의 기회도 드물었다. 기본이 3점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점당 100원으로 계산을 했으며 상한선은 10,000원으로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쪽’ ‘따닥’ ‘수류탄’ 제도는 20여 년 이상 도입이 거부되고 있다. 그나마 ‘폭탄’만이 유일하게 규칙에 이름을 올렸다.     


순미는 오늘도 ‘고스톱 판돈 전용 동전 지갑’을 일찍이 선보였다. 100원과 500원 동전이 마구잡이로 섞였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 지갑의 중량은 늘어만 갔다. 모임과 경기 수를 늘려갈수록 이 지갑의 시재 보유 한도는 상향되었다. 경기가 열릴 때마다 친구들의 주머니 속에서 뒹굴고 있던 동전은 100원, 500원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이 전용 지갑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내가 현역 시절 직장 동료들과 벌이던 고스톱판의 규칙과 우리 고향 동기들의 그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비 고돌이’ ‘팔 싸리’ ‘수류탄’ ‘월약’ ‘따닥’ ‘쪽’ 이런 재미있는 규칙은 들어설 틈이 없었다. 점당 100원, 상한선 10,000원이란 기준도 20여 년이 흘렀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변동성을 좀 더 키워 보다 다이내믹한 경기를 고대하는 나는 그동안 이 규칙이나 제도를 확 뜯어고치려고 무던 노력을 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함이 더 옳을 듯했다. 나와 한 팀으로 엮이는 선수들은 거의 여자 동기들이었다. 규칙을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고자 하면 이 ‘싸모’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힘을 합하여 이를 틀어막았다. 나는 늘 ‘사면초가’ 신세였고 이에 대한 개선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로마법’은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의 개정보다 훨씬 높은 ‘넘사벽’ 임을 매번 확인하는 데 그쳤다. 규칙에 비추어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매번 내 뜻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서너 명의 싸모들이 똘똘 뭉쳐 반대하며 내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내 편은 어디에도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내가 승률은 물론 수익률을 올린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사망’이나 ‘치명상’을 그저 ‘중·경상’으로 막을 수 있으면 선방을 한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다소 유리한 쪽으로 규칙을 해석하고자 하면 우리 싸모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이 이미 예삿일이 되었다.      


“야! 준수 저@놈, 저놈 홍단 하려고 한다. 저놈, 왜 벌써 저렇게 피가 많아?”

“야, 순미야! 우리가 아무리 서로 이무러운 고향 동기 사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한 것 아니야? 욕까지 해대는 것은...내가 너한테 무슨 큰 죄를 진 적도 없잖아?”


이래서 그 이후로 이 ‘@놈’이니 ‘저놈’은 겨우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 내가 그때 정색을 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하룻밤에 이 ‘@놈’ 소리를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들어야 할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야! 어이! 싸모들! 고스톱도 매너 게임이거든.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한 후 시간을 끌지 말고 얼른얼른 패를 내리쳐야 하는 것이야. 그렇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어도 교육 효과가 전혀 없네! 소귀에 경 읽기인가?”

“1번 경로당, 빨리 쳐! 그다음은 2번 경로당, 학교 빨리 안 가는 겨?”

“야! 패를 보고 들어간 인간이 왜 코치를 하고 그래? 네가 돈 물어 줄 거야?”

“야, 준수한테 또 혼난다. 그래, 가만히 있어!”

“너희들 마음대로 왜 자리를 바꾸는데? 즈그들 멋대로구먼! 패가 또 잘 풀리지 않으면 또 바꿀 것 아니야?”

이 세 분의 싸모들은 내게 그렇게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따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청구를 해댔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들은 기본 규칙도 본인들에게 항상 유리하게 해석했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어기기 일쑤였다.


말이 “퉁”을 외쳤으면 선은 바닥 패 6장과 선수 패 7장을 한꺼번에 나누어야 마땅했다. 선이 말의 선택에 구속을 받는 것은 고스톱 규칙 중 가장 기본이었다. 그런데 순미는 이것조차 무시했고 화투패를 다시 쳤다. 나도 이제 세상을 제법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연배가 되었다. 게다가 고스톱 구력도 자그마치 40년을 넘어섰는데 이런 매너 없고 참으로 황당무계한 ‘융 니오사변’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나는 내가 한 번 더 치면 이제 퉁을 하지 않고 패를 뗄 줄 알았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이어갔다. 세상에 자신의 몸종에게도 이런 ‘짓거리’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안하무인’ ‘기고만장’ ‘좌충우돌’에 이어 다른 문구를 들이대도 부족할 듯했다. 경기장은 순간 뒤집어졌다. 같은 팀의 선수인 경주와 애진이는 포복절도를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내 머릿속은 하얗게 리셋이 되었다. 웃음은커녕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나는 누구에겐가 세차게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내가 전생에 지은 커다란 죄에 대한 업보가 아닐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나도 집사람은 물론 장성한 두 아들이 딸린 어엿한 가장인데, 참 이것은 너무하다 싶었다.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하거나 119에 출동 요청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 가만히 오른 손바닥을 올려 보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순미한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야, 나 이제 이번 판만 치고 그만둘 거야.”
 자신은 돈을 많이 따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오늘은 경기장을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순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제멋대로였다. 이 세상 모두가 자기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듯했다. 4인 경기 공동체의 진입과 퇴진도 제 마음대로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우리 이 경기는 결코 ‘도박’이 아닌 ‘오락’이었다.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물론 반론을 들이밀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미가 퇴진을 하면 지속적인 경기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이런 경우엔 다른 선수들의 의사도 물어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제멋대로인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순미였다.     


한때 자신의 통장 잔고가 29만 원밖에 없다고 ‘겸손’을 떨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자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 국보위를 이끌던 시절이었다. 국보위란 입법·행정·사법 삼권을 모두 한데 모아 놓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이 무렵 ‘국보위 고스톱’이란 것이 등장했다. 선을 잡은 사람이 선수를 마음대로 지정했다. 점수가 나더라도 ‘고’나 ‘스톱’을 선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야 했다. 오늘 고스톱 경기에서의 순미의 행태는 이 국보위 고스톱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국보위 고스톱보다 한술 더 떴다.

경기 도중 별안간 자리를 맞바꾸는 일, 말이 ‘퉁’을 외쳤음에도 바닥 6패, 선수 7패를 한꺼번에 나누지 않고 자신이 잡고 있던 화툿목을 한 번 더 쳤던 만행, 제멋대로 이제 경기장을 떠나겠다는 일방적 통보 등은 국보위 고스톱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소불위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최고 권력자인 순미 혼자만의 ‘생떼’였다. 자신은 손바닥의 사이즈가 작기 때문에 패를 한꺼번에 나누기가 불편하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그렇다고 신체 조건의 열세를 이유로 말이 퉁을 외칠 권한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저지르는 순미의 행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 고스톱의 근본 규칙을 마구 흔들어대고 유린하는 쿠데타에 다름없었다. 자신의 손바닥이 크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법체계를 무시하거니 고스톱 경기의 근본 규칙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놈의 퉁은?”

“또 퉁이야?”

1·2번 경로당은 내가 퉁을 외칠 때마다 나를 연속해서 질책했다. 잠시 경기를 쉬어가던 중이었다. 경주는 애진이에게 세면장에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가기’나 ‘놉을 얻어 볼일 보러 같이 가자’는 격이었다.


“순미야! 경주와 애진이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야? 혹시 미끄러졌나? 세면장에 가보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저 거실에서 그랬어도 두 경로당을 나무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두 경로당은 세면장에서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실컷 키득거렸다. 이른바 ‘퉁 관련 사건’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국보위 고스톱이 유행하던 시절 삼청교육대란 초법적인 제도가 있었다. 지금 이 삼청교육대가 부활한다면 순미는 영입 대상 영 순위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준수야, 나 어제저녁에 저번 그 ‘퉁 사건’ 때문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또 한 번 실컷 웃었어. 너하고 순미 때문에 그날 하루 정말 행복했어.”

이번에 코로나19 확진자 대열에 새로이 동참한 1번 경로당의 고백이었다. 순미가 아닌 나에게만 건네는 칭찬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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