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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Sep 23. 2022

청바지와 가르마(5편 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게다가 밥벌이 등을 이유로 얼마간의 조직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대세이다.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 눈이나 평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너무 골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생애 처음으로 청바지족에 데뷔하는데 너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여 선뜻 나서지 못한다면 나는 이후 영원히 청바지와 친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은 뻔했다. 당당히 먼저 저지르고 보는 것이 맞을 듯했다.

      

손 때 묻은 자동차 키가 집을 나간 지 약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추석 명절을 지내기 위해 또 한 곳의 보금자리인 인천행에 나섰다. 지난번 해프닝 때 쇼핑백에 담았던 정장형 바지 중 비교적 밝은 색상의 바지로 바꿔 입기로 했다. 건너 방의 입식 옷걸이에 고이 걸어둔 바지를 꺼내던 순간이었다.   

  

어닝쇼크‘가 아닌 ’ 어닝서프라이즈‘가 더 옳을 듯했다. 바지에 혁대를 갈아 끼우고자 했다. 바지 오른쪽 앞주머니의 안쪽 아래 부분에 순간 목직한 타원형의 정체 모를 물체의 질량과 볼륨이 감지되었다. 바지의 오른쪽 앞 주머니의 아래쪽엔 동전 보관용 공간으로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이른바 동전 주머니가 별도로 따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바 '주머니 속의 또 다른 하나의 주머니였다. 앙증맞은 크기였다. 맞춤형

정장 물론 기성복 바지의 주머니도 이렇게

디자인하는 것이 요즘 대세이다.

     

나야, 나!”

이 정체 모를 물건은 주인장을 향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집을 나간 지 보름 동안 이곳에서 아주 쥐 죽은 듯이 편히 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간 애타게 찾던 바로 그 화상이었다. 손 때 묻은 내 자동차 키가 제 모습을 빼꼼히 자랑하고 나섰다. 참으로 황당했지만 반가운 마음이 훨씬 앞섰다. 이미 두 개나 되는 자동차 키를 완벽하게 복원을 시켰지만 집 나간 이 오리지널 키를 회수하지 못한 것이 늘 찜찜하던 터였다. 속이 다 후련해졌다.

      

내가 견인차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던 내 애마에 마지막으로 올린 쇼핑백은 모두 3개였다. 고향 절친은 내게 이 쇼핑백을 이미 샅샅이 수색했다고 큰 소리까지 쳤었다. 하지만 바지 주머니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은 수박 겉홡기에 그친 셈이었다.

     

매장의 바닥에 떨구었다면 적어도 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났을 거야?”

그리고 매장의 점원 모두가 자신들이 여러 번 확인했다는데?”

만약 화장실 선반 위에서 발견되었다면 청소하는 분이 관리실에 건네주지 않았을까?”

혹시 어린이들 눈에 띄었으면 호기심에 집으로 가져갔을 수도 있겠지.”

별의별 추측과 상상이 난무했다. 우리는 바지 주머니도 살피는 세심함이 필요했다. 바로 반 발짝 차이였지만 이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대가가 너무 컸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 누구는 그저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이를 거꾸로 뒤집거나 약간 비틀어서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아주 좋은 글감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길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유사하거나 반대편에 있을법한 사례를 모으면 더욱 글감이 풍부해진다.  

   

피팅 룸에선 내가 새로 고른 바지를 입어 볼 때 지갑과 스미트폰, 키를 새 옷 주머니로 옮긴 후 공교롭게도 이 문제의 키만 내가 입고 다니던 옷으로 다시 원상 복귀를 시키고 못했다. 주머니에 그대로 남겨 둔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내가 그간 움직였던 궤적이 모두 복구되는 순간이었다.

     

2개월 전 수도권 나들이 때 자동차 제네레

이터가 명이 다한 관계로 겪었던 해프닝에

이어 또 반갑지 않은 사건이 뒤를 이은 것이었

. 나는 이제는 건망증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연배가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정도가 심해지는 건망증과 ‘동행’ 해야 하는 대가 치곤

너무 가혹했다.

     

그나저나 생에 첫 청바지족 데뷔는 아직도 그 일정에 기약이 없다. 손 때 묻은 자동차 키를 보름간 신줏단지 모시듯이 잘 품고 있었던 밝은 톤의 회색 바지에 더욱 애착이 갔다. 오랜 기간 동안 직장생활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캐주얼 복장보다는 양복 정장 차림에 훨씬 익숙해져 있

. 그래서 간편 복장으로 나설 때도 준정장 바

지를 훨씬 선호한다. 이 선입견을 과감히 떨쳐

버릴 수 있는 날이 언제 올지 아직도 영 자신이 없다. ‘천동설에서 ‘지동설’ 시대로 옮겨 가는 것만큼이나 힘들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한 때 명성을 날렸던 축구 선수의 가장 큰 장점은 반박자 빠른 움직임이었다. 우리 일행이 새로 손

에 넣은 바지 주머니를 찾아보는 반 뼘만큼이라

도 생각을 더 했다면 이번 같은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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