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터기 Oct 24. 2022

추억의 창고 집과 5일장 시대(5편)


                         

며칠 전이었다. ‘7문짜리 진짜 타이어 표 검정 고무신은 방수용에서 흡수용로 전락했다. 밑바닥이 닳아 헤어져 비 오는 날이면 고무신 안 쪽으로 빗물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새로운 신발로 바꾸어 신기 전에 꼭 한 번 더 들러야 하는 곳이 있었다.  

   

우리 창고 집 바로 옆에 자리했다. 5일장 다른 코너보다 바닥을 돋운 네모난 영업장에서 신발을 때우는 아저씨를 찾아 나섰다. 신발을 때우는 기계는 꼭 기름을 짜내는 것처럼 쇠 막대기를 위아래로 돌려가며 죄었다 풀었다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앏고 여린 양철판에 줄지어 송곳으로 구멍을 낸 다음 안쪽엔 성인 남자 한 뼘 길이 내외 나무토막을 넣고 둘둘 감아 부착시켰다. 뚫어지거나 해어진 신발 부위를 이 도구로 몇 번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이는 자전거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이를 때우는 방식과 아주 같은 원리였다. 신발과 새로이 이에 덧대는 다른 고무 조각의 부착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아저씨는 고무를 살짝 녹여서 손으로 쩍쩍 누른 다음 신발을 척척 끼우는 기계에 놓고 꾹 다시 한번 더 눌렀다. 그 후 가늠된 시간을 기다렸다. 신발 때우는 기계 역시 불로 데운 후 사용했다.

      

지금은 이런 수선 문화를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휴대폰의 액정이 손상되어 A/S를 원하는 고객에게 액정만을 수선하거나 교체할 바엔 새 단말기를 들여가라고 응대하는 기술자를 만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비가 미덕이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과잉 대응 내지 낭비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가방이나 우산 등 수리공이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내 본적지 300번지 시대엔 어머니는 겨울밤엔 진 양말을 알 전구를 넣고 기워 신던 아련한 기억도 있었다.

     

5일장 시대 구슬치기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손에 들고 조준 후 던져 맞추어 승부를 내는 것과 발로 구슬을 굴려내는 것이 그것이었다. 손경 기는 상대적으로 키가 큰 친구가 비교적 유리했다. 그다음은 시력과 과녁을 맞혀내는 양궁 선수의 역량에 따라 승부가 좌우되었다.  

   

이에 반해 발로 굴려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이 ‘발 굴리기 경기엔 특별히 정교한 기술과 타고난 감각이 필요했다. 고무신이나 운동화를 신은 발을 구슬 위에 올린 다음 내 구슬을 굴려 상대의 구슬을 맞추거나 적어도 자신의 발 하나의 길이 반경 안쪽으로 들어놓으면  이기는 것이었다. 5일 장터 위가 주 경기장이었으나 때론 신작로 위의 빛깔도 깔끔하고 일정한 강도가 보장되는 ‘도대 흙길 위는 더욱 훌륭한 곳이었다. 이는 먼지가 폴폴 날리는 흙으로 덮인 축구 경기장과 고르게 잘 손질된 천연 잔디 구장의 차이에 딱 맞았다.

      

경기장이 어느 곳인지, 고무신이냐 운동화냐, 신발의 노후 정도에 따라 경기 운용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구슬 위에 신발을 조심스럽게 올린 후 구슬을 누르는 힘의 강약과 어느 부위·시점부터 굴리기를 시작할 건지 이에 더하여 속도의 완급 조절 등 많은 변수에 따라 승부가 갈렸다. 선수가 신고 있는 신발의 길이 반경 안으로 자신의 구슬을 옮기는 데 성공하면 상대의 구슬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조건이 같다면 일반적으로 신발의 문수가 큰 선수가 다소 유리했다.

      

유리로 된 구슬이 대세였으나 가끔 묵직한 쇠붙이에다 사이즈가 더 큰 구슬도 등장했다. 이 쇠붙이 구슬의 값어치는 유리구슬의 5~10배로 환산하여 거래가 되었다. 배수만큼의 승수를 쌓아야 승자는 이 쇠붙이 구슬을 상대 선수로부터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쇠구슬을 애지중지하는 모든 친구들의 관행 때문에 쇠구슬을 넘기는 대신 유리구슬을 배수만큼 내어 놓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 쇠구슬은 대물림하는 가보대접을 받았다.  

    

에이, 이것쯤이야. 뭐 쟀~ ~ .”

구슬을 굴려 상대방의 구슬과의 거리를 자신의 신발 문수 반경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신발 사이즈와 힘의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절대적 변수는 아니었다. 먼저 경기장의 지형지물을 세밀하게 파악한 후 구슬을 굴리는 힘의 완급 강약 조절이 더 중요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세계에 널리 자랑하는 정교한 젓가락 사용 기술 겨루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지금과 달리 초등생 시절 같은 또래 대비 키가 작았다. 그래서 손 경기보다 발경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중학교 문에 들어설 때까지 제대로 된 운동화는 내 차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운동화 발보다는 고무신 발로 실력을 발휘하기에 적합했다. 적당히 닳아 헤지고 내 발과 거의 일체가 된 고무신을 신은 발을 구슬 위에 올리면 때론 가벼운 간지럼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때보다 이 구슬치기에서 내 승률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자신이 평소 굴리던 손에 익은 차량이 운전하기에 편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5일장을 찾는 상인들의 봇짐의 운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우리 면내에 보금자리를 둔 상인들은 달구지나 리어카를 동원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외지 상인들5일장 봇짐 전담 화물차량의 신세를 져야 했다. 봇짐을 최종적으로 꾸려내는 바깥 포장재는 흰색 광목천이 대세였다. 괴나리봇짐을 꾸릴 때도 이 광복이 다른 소재보다 수월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이 외지 상인이 주로 이용하는 화물차량은 차량 재원이 3/4톤인 것에서 유래한 쓰리쿼터 화물차였다. ‘디귿자모양의 쇠꼬챙이를 차량 전면 중앙 하단의 홈에 깊게 끼워 넣고 시계방향으로 힘껏 돌려 시동을 거는 방식이었다.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가는 한 겨울 5일 장날엔 이 회물차 시동을 거는데 차장과 조수는 보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다.  

    

같은 부락 병주 선배는 최근 조수에서 차장으로 승격이 되었다. 당시는 운전기사와 조수로 불리는 21조로 화물차 운행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도제식으로 움직였다. 자가운전이 일상화된 지금과 달랐다. 운전면허라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었고 운전수는 어엿한 전문직종으로 대접을 받았다.  5일장 전용 화물차의 고정 차장 자리를 꿰찬 후 동네 주민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병주 선배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앞에 생생하다.                                                       

작가의 이전글 추억의 창고 집과 5일장 시대(4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