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조 팀장, 저기 김태진 씨 셔츠, 다른 것으로 갈아입히지. 줄무늬를 입고 출근했네. 백화점에 들러 무늬 없는 하얀색을 마련해서 빨리 조치를 취했으면 좋겠어. 내 입사 동기인 본부 방 부장이 올 텐데... 일단 지적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니야?”
오늘은 일과 마감 후 ‘업무평가고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임원과 부서장을 제외한 모든 직원은 이 시험에 의무적으로 응시해야 했다. 점장 입사 동기가 우리 지점 시험감독으로 오기로 한 데에 관한 대책 중 하나였다.
서무 조 팀장은 우리 점장의 하늘 같은 명령을 즉각 받들었다. 조 팀장은 열 일을 모두 제쳐두고선 신입사원 셔츠를 하얀색 민무늬로 금세 갈아입혔다. 비닐 포장지 안에 고이 정돈되어 포장된 셔츠를 다림질할 겨를도 없이 신입사원에게 갈아입히는 미션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우리 지점엔 남자 탈의실이란 공간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지점 대비 그 환경이 매우 열약한 금고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입사원은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었다. 자신 때문에 점장을 비롯하여 서무팀장이 움직여야 했음에 좀 머쓱해졌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좀 심한 것 같은데, 색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검은색 줄무늬만인데...’
이런 것이 책임자를 비롯한 휘하 남녀 직원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오늘 회사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업무평가고사만 없었다면 신입사원 셔츠를 굳이 즉석에서 갈아입히는 이런 이례적인 특단의 조치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본디 우리 점장은 종래부터 지점을 꾸려가며 다른 부서 직원이나 특히 본부 윗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비우호적인 점이 알려지거나 부각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지배인인 점장 자신의 리더십에 부정적인 평가를 가져올지도 몰라 항상 전전긍긍했다.
약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초임 책임자인 내가 부하 남녀 직원들을 대상으로 업무교육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점장은 중간에 갑자기 끼어들어 즉흥적인 훈시에 나섰다.
“모름지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융기관이란 곳은 고객의 신뢰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평소 근무 복장에도 항상 많은 신경을 써야 하지요. 남자 책임자는 물론 남직원들도 주로 검은색, 짙은 회색, 감색 등 싱글을 착용해야 합니다. 셔츠도 무늬가 없는 흰색만을 택해야 합니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점장의 직원 복장에 관한 이런 생각이나 방침은 자치 법규인 사규나 그 밖의 복무지침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품위 유지’ ‘단정한 복장’ 등 이런 말은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근무복 기준에 관해 제시한 점장의 가이드라인은 아무래도 일종의 과잉대응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점포 전체에 관한 무한 책임을 지는 점장이지만 이런 우리 점장의 조치에 선뜻 동의하는 직원은 물론 다른 책임자도 별로 많지 않을 듯했다. 직원 근무복에 관한 이런 사전 교육이 있었음에도 신입 김태진 씨가 이를 지키지 않았음에 점장은 몹시 불편한 것으로 보였다.
이번 업무평가고사 시험 감독은 각 부서장들을 서로 바꾸어 배치했다. 우리 지점만 치르는 시험이었다면 이번 점장 조치는 어쩌면 발동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점장 입사 동기인 본부 부서장이 우리 지점 감독으로 나섬에 따라 혹시라도 조그마한 책을 잡힐 것 같은 우려가 이번 해프닝의 발단이었다.
약 2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다른 연고 점포로 전보발령을 받아 근무 중이었다. 지난 주말 본부애서 마무리된 임 부서장 회의 결과를 우리 점장은 전 직원을 모아 전달교육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남 직원은 물론 책임자 모두는 앞으로 색상이 입힌 셔츠를 제한 없이 입어도 된다고 사장님이 직접 일렀습니다. 이미 이런 방침을 일찌감치 눈치챈 일부 부서장들은 형형색색 컬러풀한 셔츠 복장으로 회의장에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도 긴팔 셔츠라면 어떤 색상을 골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각자 여러분들 취향에 맞게 색상을 선택해서 입으시면 됩니다.”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극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최근 정부기관 고위직 근무 경력을 자랑하는 새로운 사장이 부임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위계질서, 위엄권위, 신뢰를 중시하는 공무원은 따지자면 금융인에 비해 더욱 보수적인 조직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조직에 오랫동안 몸을 담아왔기에 자신의 몸에 밴 사고방식이나 틀을 일거에 허문다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용기였고 결단이었다.
나는 여기서 몹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내가 직전에 근무했던 점포 점장의 최근 처신에 관해 근황을 알고 싶어졌다. 당시 사내 업무평가고사 시험을 앞두고 신입직원 줄무늬 셔츠를 민무늬 하얀색으로 즉석에서 갈아입혔던 장본인이었다. 이 점장은 아직도 금융기관 직원이 고객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선 민무늬 하얀색 셔츠만을 입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졌다. 최근 본인의 평소 복장도 내 관심 범주에 들어왔다. 비록 지방 연고 점포에 근무 중이었지만 나는 인맥을 동원하여 안테나를 세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테나 가동을 접기로 했다.
평소 당시 심 점장의 캐릭터를 미루어 볼 때 다만 내 추측이 꼭 들어맞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약 3년 남짓한 세월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도 금융인은 고객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는 점에 변함이 없다는 데 누구나 동의했다.
당시 고객에게 신뢰감을 주는 복장을 강조한 심 점장은 분명히 민무늬 하얀색 셔츠를 즉시 벗어던지고 컬러풀한 색상의 셔츠로 갈아탔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이 부임한 우리 회사 CEO가 직원 근무복에 관한 불문율을 순간에 깨어버린 용단에 무한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휴전선 저쪽 너머 1인 지도자의 측근이 자주 보여주는 이른바 ‘물개박수’를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유도하고 자신도 불이 나도록 양 손바닥을 부딪치는 모습이 내 눈앞에 또렷하게 그려졌다.
CEO 생각이자 방침 앞에선 그간 자신이 늘 내세우던 ‘금융인의 신뢰’를 이유로 민무늬 하얀색 셔츠만을 고집하던 소신은 헌신짝이 되었다. 당시 신입직원은 오늘도 줄무늬 셔츠를 걸치고 출근하기를 즐긴다는 소식을 나는 자주 전해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