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을 잡는 것이 매인가

권력과 권세

by 그루터기


“이 담배는 입에 써서 피지 못하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당연히 바꾸어 드려야지요. 큰아이야, 장 순경님한테 이것 말고 다른 담배로 바꾸어 드려라.”


지서에 근무 중인 장 순경이 경찰 정복 차림으로 출동했다. 악명 높은 일제강점기 순사처럼 곤봉도 차고 검은색 가죽 부츠를 신은 채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장 순경이 이런 행패를 부리는데도 아버지는 결코 당황하거나 약간의 흥분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을 했다.


50대 중반인 아버지는 기껏해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장 순경에게 꼬박꼬박 존댓말까지 써가며 아주 정중하게 응대를 했다. 이제 우리 연령으로 막 20대에 접어든 나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순간 젊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가까이에 쇠망치나 손도끼라도 있었으면 큰일이라도 낼 지경이었다.


우리 가게는 지서에서 약 30m도 채 되지 않는, 엎드리면 코도 닿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관내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지서의 최말단 장 순경은 그 쥐꼬리만 한 권력을 휘둘렀다. 담배도 자신이 합당한 대가를 당당히 치르고 구입하는 것이 마땅하나 공짜로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권한 남용을 넘어 분명히 공갈죄 등에 해당했다.


조금 높은 가격의 담배를 자랑스럽게 탈취한 장 순경은 이를 집어 들고 지서로 개선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오늘 있었던 행패가 일어난 정확한 시각을 메모해 두는 등 향후 대책 준비에 나섰다.


오늘의 일이 있기 전에도 장 순경은 우리 가게에 자주 들렀다. 그럴 때마다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형에 관해 안부를 지속적으로 묻곤 했다.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 정보나 첩보 수집 망이 촘촘했다. 당시엔 고교 졸업생 중 대학 진학률이 10%를 밑돌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서울 소재 대학만을 따지면 이 비율은 현저히 낮아졌다.

“댁의 큰아들은 학교에 잘 다니고 있나요? 집에는 자주 오나요?”

장 순경은 수시로 물었다.

당시에는 시국 데모가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형에게 제발 데모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데모를 하면 본인은 물론 집안이 몽땅 망할 수 있다고 여러 번 부탁했다. 데모 이력이 있으면 취업도 어렵다며 명심하라고 여러 번 타일렀다. 이제껏 형은 아버지의 말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장 순경의 지속적인 추궁에 아버지는 아무래도 형이 시국 데모에 나선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가게에서 신작로를 건너 대각선 도로변에 사는 내 친구의 형은 부산 인근에서 경찰로 재직 중이었다. 사촌 형의 동창이기도 했다. 이에 아버지는 사촌 형을 통해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형의 시위 관련 정보를 얻고자 부탁을 했다. 명절 때마다 사촌 형 동창 모임에 맞추어 이 궁금증을 풀고자 했으나 속 시원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돌아온 답변이란 “아들을 너무 잘 키워서 그런 거야.”라는 알쏭달쏭한 내용이 전부였다. 이러다 보니 아버지의 형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져갈 뿐이었다. 또한, 형에 대한 안부를 묻는 장 순경의 행태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즈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입 재수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선 오직 법대에 진학하는 길뿐이었고, 그 대안 외는 없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장차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하찮은 쥐꼬리만 한 권력을 마구 휘둘러대는 장 순경 같은 중생을 손보아주리라고 여러 번 다짐했다.


세월이 좀 흐른 후 경찰인 사촌 형 친구로부터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형은 대학 내 동아리인 CCC에 가입했다. 이 조직에서 회장을 맡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형이었으니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최대 인구 7,000명을 넘나들던 면 단위에서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지서에서 형을 첩보 수집 대상에 올렸던 것이었다. 수시로 동태 파악도 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었다. 이 장 순경이란 중생은 겨우 이런 것을 빌미로 아버지에게 공갈이나 협박을 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는 오판을 했다.


그 후 나는 법대에 진학을 했다. 가끔 고향 집을 찾았다. 우연한 기회에 장 순경은 얼마 후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 세상을 등졌다고 하는 소식을 접했다.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장 순경을 손보아줄 기회마저 놓쳐 버리니 못내 아쉬웠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장 순경의 결말에 관해 혀를 끌끌 차면서 동정을 했다.

장 순경의 행패가 있은 지 어언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택지의 물색이 여의찮아 아버지는 맹지에 가까운 터에 양옥집을 신축하기로 했다. 그러자 경계에 접한 이웃집 주인장들의 갖은 방해와 민원이 잇달았다. 게다가 집을 짓기 위해 경계 측량을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 대지의 일부를 인근 지서에서 불법 점유하고 있었던 사실이 바로 드러났다. 이에 지서의 담을 헐어버리고 불법 점유된 대지 부분을 찾아내어 공사를 이어가려던 참이었다.


오랜 세월 전에 행패를 부린 적이 있는 장 순경을 대신하여 이번에는 관내 치안의 총책임자인 지서장이 전면에 나섰다.

“선생님의 대지를 찾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 지서 담을 안쪽으로 들여 새로 쌓아 주시고 화장실까지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는 황당무계한 민원성 협박을 했다. 장 순경의 행패에 비해 버전이 세련되게 업그레이드된 셈이었다.


나는 필생의 과업이었던 사법시험에의 최종 합격을 이루지 못했다. 평생 한을 남기고 취업을 한 5년 차 내외의 봉급생활자가 되었다. 이제 약 15년 전의 장 순경이 행패를 부리던 시절과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나는 아쉽게도 법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법대 동기생이나 선후배들은 내로라하는 권력기관이나 공직을 비롯해 여러 곳에 포진해 있었다.


이에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의 힘을 빌기로 했다. 저간의 소식을 전해 들은 동기로부터 순식간에 짧고 명쾌한 답신이 돌아왔다.

“우리 회사의 그쪽 지역 담당자에게 일러두었네. 공연히 노인네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고 자중자애하라고 했으니 그리 알게나.”

사이다 같은 좋은 소식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지서장은 자신의 요구를 더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우호적으로 돌변했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갑자기 모처의 상부에서 날아든 간단한 메시지에 장 순경의 행패보다 더 무거운 협박성 민원은 이렇게 해서 한 방에 날아갔다. 예전 장 순경의 행패에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하다가 이번에 그것의 몇 배 이상으로 되돌려주었다. 참으로 통쾌했다.

자고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권력의 힘이란 막강한 것이다. 18년간의 1인 군사 독재체제와 권위주의 시대를 겪은 우리나라는 더욱 그러했다. 그 이후 엄청나게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소위 돈이나 권력이 없고 배경이 없는 사회적 약자인 민초들이 설 자리는 아직도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6·25 참전 용사인 아버지의 일화가 떠올랐다. 당시 사회적 약자인 민초들만이 군에 입대하였다. 한국전쟁의 최전선에서 국가의 기둥인 이병과 일병이 전사할 때 ‘빽’이라는 단말마 같은 소리를 질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 한이 된 이른바 ‘배경’이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최후의 절규였다.

지금 장 순경이나 지서장이 살아 있다면, 자신들이 거들먹거리고 유세를 부리던 ‘꿩’이었다면 주위엔 자신들을 잡는 ‘매’도 있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꿩이나 매, 모두 일반 민초들처럼 평등하고 공정하게 대접받는 민주화된 사회를 나는 오늘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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