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내력이니 DNA 어쩌고 해도 변명하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선친을 비롯하여 조상 할아버지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뿌리 깊은 실력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너는 이다음에 커서 절대 술을 마시지 마라"라고 신신당부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나는 어머니의 이 바람을 따를 수 없었다.
오후 6시 정도에 도서관에 있던 대학 동기 다섯 명이 알코올이 당기는데 형편 걱정을 했다. 우리 친구 일행은 제대로 된 지갑이 없던 시절 꼬깃꼬깃한 코 묻은 돈을 모았다. 세종대왕 두장을 어찌 아쉬운 대로 구했다. 이 정도론 모자랄 텐데 어디 아는 곳 없을까 하던 차에 내가 자신 있게 나섰다. 몇 번 가본 적이 있기는 한데 일단 지르기로 했다.
저희들, 오늘 술을 정말로 마시고 싶은데 이런 사정이라고 생맥주집 안주인께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안주인은 담보될만한 것을 요구했다. 최후의 보루인 "쌍방울"(19금)은 나중을 위하여 남겨두었다. 손목시계를 몇 개 모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값어치도 없는 전자시계도 섞여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안주인은 전에 이곳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나의 얼굴을 실제 담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 ●●영양센터 "라고 유리벽에 코팅을 한 그 집의 메뉴판 복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맥주인 500 CC 450원 / 1,000CC 800원 / 4홉들이 대자 병맥주 1,000원 / 골뱅이 무침 작은 것 2,000원 / 큰 것 3,500원 / 전기 구이 통닭 한 마리 4,000원 내외 정도로 대표 안주인 ‘골뱅이 무침과 전기구이 통닭’의 맛은 아마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가격대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요새 말로 가성비가 아주 좋은 주점이었다.
결국 나중엔 나의 단골 주점이 된 이곳의 단연 최고의 대표 안주인 ‘골뱅이무침’은 통조림의 골뱅이를 주 재료로 사용했다. 브랜드는 유동만을 고집했다. 소자는 작은 통조림 대자는 당연히 큰 통조림의 골뱅이를 사용하는데, 다른 곳의 골뱅이와 달리 씨알이 월등이 컸다. 안주인의 말에 의하면 같은 브랜드인 유동이라도 캔의 외부를 두른 종이에 붙어 있는 골뱅이 그림 사이즈가 작은 여러 개가 모여있는 것이 아닌 큰 것 하나 내지 두 개 정도 있는 것을 사용한다고 했다. 나에게 일종의 영업비밀 내지 꿀팁을 살짝 귀띔했다.
주재료인 큰 사이즈의 통 골뱅이를 자르지 않고 사용했다. 다른 주점과 달리 오징어포 대신 상대적으로 고가이고 레벨도 한 단계 이상 높은 대구포를 넣었다. 또한 파무침, 참기름, 깨소금, 식초 등을 황금 비율로 배합하고 거기에 안주인의 손맛이 더해져서 명품 골뱅이무침은 탄생했다.
당시 내가 검증은 해보지는 못했지만 요즈음의 대부분의 식재료가 중국산인 것과는 달리 100% 국내산이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중국산 식재료가 국내에 공식적으로 들여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두 번째 메인 안주는 “전기구이 통닭"이었다. 동물성 기름을 거의 모두 제거하는데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아주 담백하고 식감과 육질이 뛰어나 입에 착착 달라붙는 감칠맛이 돌았다.
우선 골뱅이 무침을 맥주 안주로 출발은 했다. 맥주를 마시다 내용물이 어느 정도 소진되는 경우 대구포 만 500원에 따로 주문할 수 있는 ‘중간 추가 메뉴 제도’가 있었다. 너무 아쉽게도 사이즈가 큰 통골뱅이를 추가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
골뱅이 무침과 달리 완성품 안주를 식탁 위에 올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이 전기구이 통닭은 미리 선주문을 해야 했다. 당시로서는 휴대폰 시절이 아니었다. 다른 안주와 맥주로 술자리가 어느 정도 달구어진 이후에 추가 주문하거나 생일이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경우 주문하는 2등 메뉴에 그쳤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이 주점을 나와 같이 방문한 연인원은 1,000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고향 절친은 이곳에 올 때마다 골뱅이 무침에 식초를 추가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선배는 재료를 테이크 아웃하여 가기도 했다. 여름철엔 오이, 겨울철엔 고구마를 썰어주었던 서비스 안주도 일품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유료화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처음에 안주인에게 약속한 범위 내어서 그 맛있는 골뱅이무침과 생맥주를 정신없이 퍼마신 일행을 테이블에 둔 채 나는 용감하게 카운터로 향했다. 안주인에게 정산을 하려고 지폐 두장을 내밀었다. 그 순간 안주인은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담보물로 잡은 일행의 시계를 모두 돌려주었다. 순간 나는 매우 당황했고 꼬끝이 찡했다. 말 그대로 우리 일행을 충분히 믿었던 것이었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술값이 나중에 부실채권이 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학생 신분인 우리들은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체크카드도 소지할 수 없었고 캐시(현금) 아니면 크레디트(외상)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었다. 그 후 안주인에게 나는 VVIP 고객이 되었고 엄청난 매출을 올려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는 오로지 현금거래만 있었지 술을 외상으로 마신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외상술을 마신다는 것은 일종의 부모님에 대한 불효이고 큰 죄를 짓는 거란 고루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친구들을 비롯하여 주위에서는 ‘외상술’ 이란 것이 어느 정도 일상화(?)된 것도 나만 모르고 있었다. 흔히들 당시 담보로 시계, 학생증, 책가방, 추억의 워크맨 등이 있었다. 좀 머리를 쓰는 친구들은 담보물의 가치를 높이려고 본인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책들을 하나 가득 담은 가방을 내밀었다. 그러면 주점에서는 더욱 안심하여 기꺼이 담보물로 받아주었다.
해당 주점은 4인용 2인용 테이블을 포함하여 모두 7, 8개 정도 식탁이 자리했다. 실내 화장실은 "서서 쏠 수 있는" 성별만이 이용이 가능한 구조였다. 보통 술자리란 2인 이상이 대작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깬 이 주점 단골인 한 선배는 면벽 구도를 하듯이 벽 쪽을 쳐다보며 혼술을 즐기기도 하였다. 나중엔 나도 멋진 철학자같이 보일 겸 또 이십 대 중반의 그 무거운 사법 시험 문제, 군대 문제, 연애 문제 등을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는 자리로 활용하여 선배의 길을 그대로 따르곤 했다.
내가 이 주점의 테이블에 자리하면 거짓말같이 다른 손님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음은 안주인은 물론 당시 단골손님들도 모두 인정했다.
오늘은 나의 귀 빠진 날을 축하해주겠다고 친구 몇 이서 이곳에 모였다. 안주인에게 사연을 말씀드
렸다. 이 또 무슨 "장난의 운명" 인가. 태릉 인근에 자리한 ×× 여대에 다니는 자신의 딸 생일도 바로 오늘이라고 하였다. 맥주와 통닭 중 하나를 서비스로 선택하라는 엄청나게 고마운 배려도 받았다. 특별한 날이니까 생맥주가 아닌 4홉들이 큰 병맥주를 무려 10병이나 마실 수 있는 행복을 누렸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6살 어린 생일이 같은 안주인의 딸 배우자감으로 혹시 나를 생각했을 수 있다는 흐뭇한 상상을 했다. 그날은 코가 상당히 삐뚤어졌다.
당시 군사훈련이 정규 과목으로 당당히 살아 있었다. 교관이나 조교들은 늘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한 달 술값을 급여일에 이른바 1/N로 한꺼번에 해결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현재는 없어진 양질의 일자리였다.
군대 문제를 계속 뒤로 마 루어 놓은 나와는 달리 재학 중 군에 입대하여 휴가를 나오거나 외박 외출을 한 친구들이 고맙게도 나를 학교로 찾을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주머니 현금이 부족하더라도 이 단골집이 있어 큰 걱정이 없었고 늘 든든했다.
마이너스 통장거래를 하듯이 쌓인 외상을 한꺼번에 갚을 형편이 되지 않을 땐 외상을 일부 갚은 후 다시 추가로 외상 거래가 이루어졌다. 안주인이 잘 챙겼겠지만, 나는 아마도 외상의 상당한 부문을 탕감받는 혜택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동대문구 휘경동 로터리 못 미쳐 횡단보도 인근에 자리 잡았던 이 단골집이 내 사무실 인근에 있다면 매일 출근부에 도장을 찍을 수도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그 안주인의 ‘골뱅이 무침과 전구 구이 통닭’의 맛을 다시 볼 수 있는, 세상에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오늘 퇴근 후엔 또 하나의 단골집인 여의도의 모 주점 대표 브랜드인 골뱅이무침을 테이크 아웃해야겠다.